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일러스트 | 정선주 외부기자 webmaster@skku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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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힘이 지배력의 본질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근대세계가 제국과 식민지를 나뉘게 된 것은 무엇보다 서구사회가 자기의 땅 밖으로 멀리 뛰쳐나갈 수 있는 운송수단을 갖고 있었던 탓이다.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인들이 직면했던 ‘서세동점’이라는 상황은 수천 킬로의 항해가 가능했던 서양 각국의 군함에 의해 구현된 일이다. 그들은 갈 수 있었던 모든 곳에서 무엇인가를 가져와 자기 나라에 축적하는 일을 계속했는데, 그것은 이동의 능력을 국가의 팽창에 집중하던 시대의 풍경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동하는 힘의 비대칭성은 점차 해소되었다. 우선 이동의 시발점이 세계 각 지역으로 다원화되었다. 개인들이 이동의 주체로 급격히 부상한 현상도 근본적인 변화의 하나이다. 이제 국경을 넘어가는 일은 누구에게도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권과 항공권이 준비되면 언제라도 세계 각지도 날아갈 수 있다. 이러한 여행의 자유는 우리들의 지식과 감성체계, 타문화의 이해 방식 등을 새롭게 만들었다. 각 지역의 시공간을 모자이크처럼 이어 붙여 탄생한 이른바 ‘세계화된 인간’이 현생인류의 보편적 자질이 된 것이다. 법무부 통계에 의하면 2018년도 출입국자는 8890만(한국인 5786만)여 명이다. 2010년 4000만 명을 넘어선 후 8년 만에 2배 이상 증가한 수치이다.

그런데 코로나 팬데믹은 이러한 이동의 열기를 순식간에 식혀버렸다. 가속도에 가속도가 붙어 그 대열에 올라타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게 만들던 숱한 질주의 현장들은 어느새 싸늘한 정지화면 상태로 변해 버렸다. 멈춰진 몸의 현실과 달리고 있는 듯한 착각이 겹쳐지며 생겨난 혼란은 많은 이들을 인지부조화 상태로 몰아넣었다. 이질공간들을 빠르게 넘어가는 속도감 자체를 정상으로 받아들이던 몸이 그 갑작스러운 ‘멈춤’을 수용하지 못하고 밀어내거나 부정하는 이상반응도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낙관적인 예측대로 멀지 않은 시간 안에 백신과 치료제가 만들어진다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만약 기대가 어그러지면 과연 어떤 일들이 발생할 것인가? 그리고 어떤 대안들이 필요할 것인가? 

‘자가격리’라는 생소했지만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단어는 창궐하는 역병의 현실을 상징하는 신조어이다. 이 말은 스스로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필연적으로 새로운 사유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자극한다. 그 속에 담겨있는 ‘멈춤’을 강요하는 가공할 구속력 때문이다. ‘자가격리’라는 말을 우리는 ‘이동할 수 없다’ 혹은 ‘자기 공간 외부로 움직이지 마라’는 강제성의 요구로 읽는다. 여기에는 공공질서를 대변하는 국가의 제안과 질병의 공포에 노출되지 않으려는 개인들의 자발적인 동의가 결합되어 있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안전을 담보하는 유일한 길은 외부와 철저하게 단절된 자신만의 거처 속으로 숨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달리는 자’라는 현대인의 본능을 제거하지 않을 수 없는 절벽 앞에 서 있다. 가능한 일일까?

이동은 비교를 운명처럼 품고 있는 현상이다. 더 좋은, 더 멋진 곳을 찾아 재빠르게 움직이는 존재들이야말로 포스트모던 시대의 총아들이었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이 그들의 장점을 순식간에 치명적 단점으로 만들고 있다. 지금은 오히려 자신의 장소 자체를 빛나는 곳으로 상상할 수 있는 자들이 행복해지는 시간이다. 익숙한 것들 속에 감추어져 있는 가치를 발견하는 능력과 지혜가 필요하다. 자기를 키운 고유한 시공간이 담고 있는 매력을 찾지 못한다면 ‘이동할 수 없는 현대’라는 형용모순의 상황에 오랫동안 적응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오늘, 집 근처를 다니며 평소 무관심하게 지나쳤던 많은 장소들이 가지고 있는 그들만의 몸짓과 표정을 살펴보자. 생각지 못했던 영감과 기쁨이 솟아오를 것이란 기대를 가지며.

한기형 교수 동아시아학술원
한기형 교수 동아시아학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