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시험 기간이 다가오면 수업 분위기가 전혀 딴판이 된다. 평소에는 다소 느슨했던 수업에 묘한 긴장감이 넘친다. 이전에 자주 결석했던 학생들도 자리를 지켜서 강의실은 빈자리를 찾아보기 힘들다. 밤샘 시험공부를 했는지 몇몇 학생들의 눈가에는 다크 서클이 완연하다. 그럼에도 졸지 않고 기를 쓰며 수업을 경청한다. 제한된 시간 동안 답안지를 채우는 시험 시간은 그런 분위기의 절정에 해당한다. 고도의 긴장 속에서 ‘사각사각’ 글씨 쓰는 소리만 팽팽해진 정적(靜寂)을 긁고 있다.

한 학기 수업 내내 이만큼의 집중력을 발휘했다면, 아마 무엇을 이루어도 이루었을 것이다. 글쟁이를 꿈꾸었던 학생 시절, 답안지 공간을 메우면서 이런 몰입도로 평생 글을 쓰면 다작의 작가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기억난다.

때때로 농담 삼아 예수님도 악마에게 ‘나를 시험하지 말라’라고 말했다는 점을 인용한다. 누군가로부터 시험받는 것은 기분 나쁜 일이다. 힘든 일이다. 자존심 상하고 스트레스 받는 일이다. 시험받는 학생만 그런 줄 알았는데, 어느덧 선생이 되어 시험을 주관하는 것 역시 스트레스 받기는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정한 기준을 마련하고 정해진 규격에 맞추어 미세한 차이의 수치화를 매번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시험 보는 데에서 의미를 찾자면, 신화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통과의례’가 있을 것이다. 이 난관을 통과하기만 하면 이전보다 성숙하고 고양된 존재가 된다는 신화 말이다. 하지만 수능시험부터 대학교에서 치러지는 시험문제들을 일별해 보면, 이런 고양의 힘을 담고 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개인이 따로 의식적으로 그런 통과의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한 말이다.

현실적으로 학교에서 치르는 시험은 더 높은 사회적 지위, 직장 등을 얻기 위한 작은 통로이기는 하다. 하여 학생들은 불안에 못 이겨 학점을 높이는 데 사활을 걸기도 한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는, 사람을 뽑을 때 학교성적은 거의 거들떠보지 않으며, 대개 낙방의 이유로만 활용된다. 학교 시험이 한 사람을 특정 자리의 적임자로 만드는 것까지는 엄두조차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화 속 영웅이 사자와 싸워 용기를 얻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지혜를 얻는 것처럼, 지금 학생들이 시험을 통과하며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지금 시험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독일 철학자 야스퍼스의 『대학의 이념』(민준기 옮김, 서문당, 1996)은 대학의 이념을 논한 고전에 속한다. 2차 세계대전 끝 무렵에 쓰인 이 책에서 그는 대학의 존재이유와 나아가야 할 바를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야스퍼스는 시험에 대한 철학자의 생각까지 펼쳐 보이기도 한다. “근본적으로 시험은 이미 행해진 것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며,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자유에 대한 훈련을 통해 얻은 자기 선택력을 의미한다. ··· 대학의 본질 그 자체는 각 개인이 결과적으로 무(無)로 끝날지도 모르는 공인된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전 학습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의 선택권을 행사할 것을 요구한다(193쪽).”

한마디로 대학의 시험은 자유인을 키우는 최종 관문이다. 대학은 연구와 교육을 위해 사회로부터 일정 정도 격리되고 보호받는 곳이라고들 한다. 그렇다고 편안하고 안락하기만 한 곳이라고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진리와 자유를 위한 살벌한 시험이 엄존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시험이란 그간 찾아낸 진리를 확인·검증하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자유의 능력을 최대로 신장시키는 주요 행사다. 대학의 시험은 진리와 거짓, 자유와 굴종을 가르는 진검 승부의 아레나(arena)다.

연구를 수행하는 학자(대학원생 포함)와 교육받는 학생은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시험에서 찾을 수 있는 마지막 의미는, 성패와 무관하게 오롯이, 자신이 행사한 자유에 책임지는 자세를 배우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일러스트 l 정선주 외부기자 webmaster@

 

김동규 초빙교수
학부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