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우수진 기자 (waterjean@skkuw.com)

자과캠 만남 - 강상범(화공 94) 동문

사진 I 김정현 기자 jhyeonkim@
사진 I 김정현 기자 jhyeonkim@

“어떻게 멀리 제주도까지 와줬어요.” 
강 동문은 제주의 푸른 하늘 아래에 위치한 본인의 사무실로 안내하며 반갑게 맞아줬다. 
화학공학도에서 발길을 돌려 프로 골퍼로 거듭난 강상범(화공 94) 동문을 만나 한국 골프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새로운 시각으로 골프를 바라보고 싶어
자신을 살펴보는 시간 가졌으면


논밭을 뛰어놀던 체육광 소년
“제가 살던 곳은 제주도의 촌 동네, 상명이었어요.” 농촌에서 자란 강 동문은 논밭에서 뛰어놀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른들이 밭일하실 때 도와야 해서 특별한 취미는 없었어요. 다만 일을 나가지 않을 때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 자체가 취미였죠.” 뛰어난 사교성과 친화력을 지녔던 강 동문은 반장을 맡고 학생회에도 참여하는 적극적인 학생이었다. “동네에서 소위 잘 사는 친구들은 태권도나 피아노 학원에 다니기도 했는데, 그게 너무 부러웠어요.” 그는 “여러 가지 경험을 못 한 아쉬움이 아직도 남아있어서 이 나이까지 배움에 대한 호기심이 남아있는 것 같아요”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학창 시절부터 체육은 강 동문이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었다. “운동을 워낙 좋아해서 종목 안 가리고 다 열심히 했어요. 너무 열심히 해 한 번은 학교의 축구부 선수들과 시합을 하는데 이겨버려서 선배들에게 혼나기도 했죠.” 체육에 막연한 흥미를 느꼈던 그는 TV에서 인간극장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고 체육 기관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을 키우기도 했다. “인간극장에서 IOC 김운용 위원장을 보고 반했어요. ‘이게 바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야’라고 생각했죠.” 

열정의 불꽃을 피운 대학 생활
강 동문은 학과에 대한 정보가 충분하지 않은 채로 화학공학과에 입학했다. “그때는 인터넷이 없어서 과에서 무엇을 배우는지 잘 몰랐어요. 그래서 화학공학과가 공대에서 CEO를 양성하는 학과인 줄 알고 들어갔죠.” 예상했던 전공은 아니었지만 강 동문은 활발하게 학교생활을 했다. “제가 학구파는 아니었지만 대신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했어요. 축구 동아리를 만들어 축제에서 우승하기도 하고 시 동아리나 음악 동아리에도 들어갔죠.” 특히 강 동문은 대학에 진학해서도 운동에 대한 유별난 애정을 잃지 않았다. “대학 생활 내내 거의 운동장에서 살았어요. 입학식 때도 운동장에 가장 먼저 찾아가 골대를 살폈던 기억이 나요.” 운동에 대한 그의 애정은 친구들도 익히 알 정도로 유명했다. “한 번은 제주에서 친구가 갑자기 올라왔던 적이 있어요. 당시엔 삐삐도 없었을 때여서 연락도 못 했는데 친구가 저를 바로 찾아내더라고요. 제가 항상 운동장에 있는 걸 알았던 거죠.”

강 동문은 운동뿐만 아니라 역사 바로잡기에도 열정을 쏟았다. “기숙사 사생회장이 같은 제주도 출신이라 자연스럽게 기숙사 사생회의 총무로 들어갔어요. 그때 기숙사에서 축제를 준비했는데 제주 4.3사건에 대해 알리자는 기획을 했죠.” 그는 “컴퓨터가 없어서 손수 대자보를 곳곳에 붙였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대부분의 제주도 사람이 이 사건과 관련돼 있고 우리 동네에도 희생자분이 있었어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이에 대해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이처럼 강 동문은 대학 시절을 친구들과 함께한 시간으로 기억했다. “같이 놀던 친구, 선배들과 잘 어울려서 즐거운 추억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 한 번은 자취하느라 배가 너무 고팠는데 학교에서 열린 씨름대회의 1등 경품이 라면 몇 박스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강 동문은 학과 사람들과 함께 씨름 대회에 나가 1등을 차지했다. 그는 “며칠간은 제 자취방에서 라면을 대접했던 것 같아요. 지금도 친구들을 만나면 ‘그때 라면 잘 먹었다'라는 말을 듣고는 해요”라며 웃음을 보였다.

28살, 그리고 새로운 출발
강 동문은 대학생 때 들었던 강연을 골프 인생의 출발점이라고 밝혔다. “팝페라 가수 임형주가 강연을 왔었어요. 저보다 훨씬 어린 나이였는데도 음악 하나로 세계를 돌아다녔더라고요. 거기서 오는 여유로움과 자유가 인상적이었죠.” 진로를 선택해야 하는 시기였던 강 동문에게 이 강연은 정형화된 길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됐다. “이후에 선배가 어학연수를 강력하게 추천했어요. 그때 그 강연으로 해외로 갈 마음이 생겨 한 번쯤 가보자는 생각으로 호주로 떠났어요.” 호주에서의 시간은 삶에 대한 강 동문의 태도와 진로를 바꿔 놨다. “호주에서 처음으로 골프를 접했어요. 그전까지는 골프의 ‘골’ 자도 몰랐거든요.” 

골프에 대한 좋은 첫인상은 강 동문을 골프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함께하는 사람들이 좋아서 그런지 골프가 너무 좋았어요. 앞으로 내가 이 운동을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어 그는 “마침 이 시기에 내가 무엇을 하면 좋을지 많이 고민했어요. 그래서 석 달 동안 배낭을 싸서 유럽을 돌며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봤죠. 기존에 밟아오던 화학공학을 계속해야 할지 새로운 꿈에 도전해야 할지 고민했어요”라고 말했다. 귀국한 후에 강 동문은 학교에서도 ‘교양골프’ 과목을 수강하며 골프에 대한 관심을 이어나갔다. 숙고의 시간을 보낸 그는 그동안 나를 위한 삶이 아닌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길로 강 동문은 프로 골퍼에 도전했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처음에는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어요. 그래서 다시 호주로 도망가기도 했죠.”라고 말했다. 결국 부모님께 허락을 받아낸 강 동문은 혹독한 연습에 몰두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밤 9시에 잠들 때까지 골프만 했어요. 친구 관계도 끊고 연습만 했죠. 나중에 들어보니 그때 주변에서 제가 사라졌다는 얘기도 돌았다고 하더라고요.” 강 동문은 처음 골프를 배우기 위해 한 프로 선수를 찾아갔다. 그는 “하지만 그분께서 ‘너는 혼자 할 수 있다’며 안 가르쳐 주시고 돌려보내셨어요”라며 독학을 선택하게 된 계기를 밝혔다.  

강 동문은 조언을 건넨 프로에게 고마운 마음을 내비쳤다. “독학한 것이 저에게는 행운이었어요. 처음에는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 막연하고 힘들었지만 어떤 이론이나 지식에도 얽매이지 않아 새로운 시각으로 골프를 바라볼 수 있었죠.” 강 동문이 골프에 도전한 2001년에는 유튜브와 같은 영상 플랫폼이 발달하지 않아 골프를 배울 수 있는 자료가 풍부하지 않았다. “TV의 골프 채널과 몇 개 안 되는 골프 잡지를 활용했어요. 4개 정도의 골프 잡지를 5년간 스크랩했죠.” 골프에 푹 빠진 강 동문은 당시 자신의 모든 관심을 골프에 쏟아부었다고 말했다. “2002년 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들썩였을 때도 저는 체감을 잘 못 했어요. 골프 채널 말고는 TV도 보지 않았거든요.”

골프의 대중화를 위해 움직이다
늦은 나이에 홀로 시작한 만큼 강 동문은 골프 공부에 불을 붙였다. 그는 하나하나 직접 부딪혀가며 배웠기에 골프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느낄 수 있었다. “분명히 더 쉽게 골프를 배울 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골프와 관련된 특허를 개발해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을 풀어내고 싶었죠.” 골프의 대중화를 위한 그의 결심은 특허 출원으로 이어졌다. “퍼팅 연습기구를 특허로 출원했어요. 그동안의 내 노력이 쓸모 있었다는 생각에 보람을 느꼈고 앞으로 더 개선된 발명품을 만들자는 다짐을 했죠.” 또한 그는 “특허를 공부하면  골프 기술이 얼마만큼 발전하고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할 수 있어요”라며 골프에 대한 애정을 내비쳤다. 

한편 강 동문이 화학공학을 전공한 것은 골프를 과학적인 눈으로 새로이 바라볼 수 있도록 인도했다. 강 동문은 “골프에서 스윙 등을 설명하기 위해 원심력이나 지면 반력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데 과학적으로 이런 것들은 가상의 힘이에요. 반대의 힘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죠”라며 원리를 찬찬히 따져보는 것이 골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골프 이후로 강 동문의 관심을 끈 것은 다름 아닌 ‘한글’이었다. 뒤늦게 한글의 매력에 빠진 그는 한글의 원리를 공부하며 골프에 적용했다. “우리나라의 비보이들이 세계에서 유명한 이유가 한글의 ‘소리’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한글이 우수한 소리이고 하나의 파동이라고 이해했죠.” 강 동문은 소리와 춤의 관계에 대한 역사책의 한 구절로 이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됐다. “‘춤은 보이지 않는 소리를 보이는 소리로 표현한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춤도 하나의 파동으로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한글의 소리와 규칙성에 매료된 그는 한글의 원리를 골프에 하나씩 접목했다. “거짓말처럼 다 들어맞더라고요. 한글이 과학적으로 소리를 내다 보니 그런 것 같아요. 한글의 초성과 중성, 종성이 결합되는 게 원자의 공유 결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초성은 준비 자세, 중성은 스윙 동작, 종성은 마무리 자세로 적용했어요”라며 골프와 한글의 공통점을 밝혔다.

또한 춤을 파동으로 이해한 강 동문은 기존의 골프 스윙을 양자역학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기존에는 고전 물리학을 바탕으로 스윙을 해석했어요. 그래서 ‘스윙의 이 시점에는 헤드가 이곳에 있어야 한다’와 같이 스윙의 모양을 분석적으로 명시했죠. 하지만 양자역학에서는 어떤 물체의 위치와 속도도 확신할 수 없어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인 거죠.” 또한 그는 “기존의 골프 기술은 코치의 입장에서 기술됐어요. 토머스 영의 이중슬롯 실험으로 알 수 있듯이 빛은 파동이지만 관측을 하면 입자로 바뀌거든요. 이처럼 선수가 스윙하는 것을 관측하는 코치 입장에서는 입자로 볼 수 있지만 당사자는 입자로 볼 수가 없죠”라며 선수 입장으로 재해석된 골프 기술의 개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진정한 나를 채우는 시간 보내길
강 동문은 대학 시절을 다 보내고 난 후 깨달은 것이 있다고 말했다. “대학 시절은 ‘내가 무엇을 해야겠다’는 결정을 해야 할 단계라고 생각해요. 확실히 진로를 정하고 관련된 소양을 습득해서 그 분야의 전문가로 활동할 수 있는 역량을 만들어야죠.” 더불어 그는 “대학생 때의 활동은 한 번 해보는 경험에 그치는 수준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제는 초보 수준에서 머무르지 않고 전문가들과 이야기로 싸울 수 있을 만큼의 실력을 끌어올려야 해요”라며 교수님이나 선배들한테 수동적으로 지식을 받아들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진로를 결정하기 위한 방법으로 강 동문은 자신에 대해 써 보는 것을 추천했다. “대학교 1학년 때 친구가 저를 대뜸 학교 앞 커피숍으로 불렀어요. 한 시간을 주겠다며 제가 하고 싶은 것들을 써보라고 하더라고요. 당시에는 깊게 생각하지 못 했지만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자세히 저에 대해 살펴볼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강 동문은 학우들이 행복한 일을 찾았으면 좋겠다며 당부의 말을 남겼다. 그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직업을 갖추고 경제활동을 하기 위한 소양을 찾는 것도 중요하죠. 하지만 요즘 청춘들은 학업이나 취업 등 외적인 일에 매몰돼 자신을 돌볼 시간을 많이 갖지 못하는 것 같아요.”라며 안타까움을 보였다. 강 동문은 “후배들이 자신을 들여다보고 본인이 행복해하는 일이 무엇인지 살피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어요”라며 학우들에게 따뜻한 말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