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살게된다, 제주의 어머니 현옥수 해녀

기자명 김정현 기자 (jhyeonkim@skkuw.com)

인터뷰 - 현옥수 해녀

일러스트 I 정선주 외부기자 webmaster@skkuw.com
일러스트 I 정선주 외부기자 webmaster@skkuw.com

먹고 살기 위해 시작한 평생의 직업, 해녀
아흔아홉 살까지 바다에 나가는 해녀 되고 싶어

 

해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고 있는 직업이다.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해녀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제주 해녀 문화’가 등재됐을 만큼 해녀는 잊어서는 안 될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현옥수 할머니는 평생을 해녀로 살아왔다. 한 많고 고달팠던 해녀의 삶을 생생하게 들려주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잘도 ᄉᆞᆨ았던(많은 고생을 했던) 해녀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어떻게 해녀가 됐고 준비하는 과정이 어땠나.
그 당시에는 할 수 있는 게 해녀밖에 없었어요. 해녀를 해야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에 해변 마을에 사는 소녀들은 조금만 크면 부모가 해녀를 시켰죠. 그때는 처음 시작하는 해녀의 *테왁을 만들어주기 위해 집 지붕 위에 *ᄏᆞᆨ박을 올려서 키웠어요. 지붕 위에 있는 박이 다 크면 잘 익은 걸로 따서 테왁을 만들었어요. 먼저 박을 말린 다음에 동전만 한 크기의 구멍을 뚫어서 막대기로 씨를 빼냈죠. 그 구멍을 다시 막아야 하는데 옛날에는 본드 같은 게 없으니까 고무신을 녹여서 구멍을 막았어요. 그 테왁도 없어서 남들 테왁을 빌려서 쓰기도 했어요.

처음 해녀를 시작할 때 어땠나.
어릴 때 저보다 어머니가 *물질을 나가야 수확이 더 좋았기 때문에 저는 밭일을 했어요. 그래서 스물한 살이 되어서야 해녀를 시작할 수 있었죠. 해녀를 처음 시작하면 바로 깊은 바다에 갈 수 없고 얕은 바다에서 헤엄치는 걸 연습해요. 해녀가 쓰는 물안경인 창경을 쓰고 바닷속으로 들어갔는데 모든 게 실제보다 훨씬 더 크게 보여서 처음엔 두려운 마음이 들었어요. 그런 두려움을 떨치고 바다와 친해지는 연습을 먼저 했어요. 또 얼굴을 담갔다 뺐다 반복하는 숨쉬기 연습도 했죠. 사실 해녀 일이 힘들다 보니 잘하고 싶어도 도저히 안 돼서 포기하는 사람이 정말 많았어요.

남들보다 늦게 시작해서 힘든 점도 있었어요. 저보다 작고 어린 애들은 깊은 바다까지 내려가서 미역 뿌리 부분까지 파냈어요. 그런데 저는 물질을 잘하지 못해서 깊은 바다에 들어가면 미역 끝부분만 베고 돌아왔어요. 그때 다른 친구들한테 “큰큰한 것이 아이고 메역 끊어온 상아리 좀 봐봐. 깊게 숨벼보라게(아이고 덩치도 크면서 미역 끊어온 것 좀 봐. 숨을 참고 물속으로 깊게 들어가 봐)”하고 핀잔을 들었어요. 

물질을 나가면 보통 무엇을 수확했나. 
옛날에는 미역을 주로 수확했어요. 그때는 해산물은 풍부했는데 돈이 많이 안 됐어요. 소라나 전복도 값을 별로 안 쳐줬어요. 미역은 값을 조금 더 쳐줬기 때문에 미역을 가장 많이 수확했죠. 지금은 전복 같은 해산물이 제주 특산물이 돼 수입이 조금 나아졌어요.

사실 바다에서 수확하는 건 기준이 없어요. 천 원을 벌 때도 있고, 십만 원을 벌 때도 있고 그래요. 바다에 가면 파도가 그때그때 다르기 때문에 하늘이 도와줘야 해요. 또 해산물 물가도 올랐다 내렸다 하면서 심하게 변하죠. 욕심을 부린다고 해산물을 많이 수확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운이 좋으면 해산물이 많이 보여서 많이 잡을 수 있고, 운이 없는 날은 그렇지 않죠. 

하루에 보통 몇 시간 정도 일했나.
해녀로 물질을 나가는 건 1시간 반~2시간 정도였어요. 지금은 해녀복이 고무 옷이지만 옛날에는 무명으로 만들었어요. 고무 옷은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지만 무명으로 만든 해녀복은 바로 젖어서 추위에 떨면서 물질을 나갔어요. 또 돈이 없었기 때문에 모자도 맞출 수 없었어요. 그냥 수건을 머리에 둘러쓰고 일하거나 *까부리를 만들어서 썼어요. 오리발도 없어서 그냥 고무신을 신고 물질을 나갔어요. 지금보다 장비가 안 좋았기 때문에 오래 일하지 못했죠. 

해녀 일과 함께 농사도 지었어요. 조밭에서 잡초를 뽑았죠. 아침에 바다를 나가고 오후에 농사일을 하거나 농사일을 먼저 하고 바다에 나갈 때도 있었어요. 그렇게 여러 일을 하면서 쉬지 않고 살았기 때문에 해녀들을 보고 강인하다고 얘기해요.

옛날에는 물질을 시작하면 한 달이든 두 달이든 계속했어요. 날씨가 안 좋고 파도가 세도 계속 바다에만 살았어요. 하지만 이제는 수협에서 8일 일하면 5일 쉬는 식으로 물질 기간을 정해서 물질을 마음대로 할 수 없어요. 해녀들이 수확이 없어도 물질을 하며 고생하니까 나라에서 해녀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파도가 세거나 바닷물이 차가울 때를 고려해서 물질 날짜를 지정했어요. 

생생한 물질 과정을 들려달라.
물질을 나가면 수면 위에 닻을 세워서 경계 구역을 표시해요. 그 닻이 일하는 구역이라는 무언의 약속 같은 거예요. 수확을 할 때는 무작정 바다에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이쪽으로 숨비면(잠수해서 들어가면) ‘소라가 좀 있을 것 같다’ 싶을 때 물 아래로 살짝 들어가서 방향을 먼저 살펴봐요. 그리고 보통 감태 밑에 해산물이 있기 때문에 감태를 손으로 걷어내면서 수확해요. 요새는 감태가 많이 죽어서 호미를 바위틈으로 집어넣고 긁어내서 해산물을 수확해요. 없으면 다른 바위를 찾는 거고 소라가 올라오면 수확하는 거예요. 모든 게 다 감이죠. 또 될 수 있으면 깊은 바다를 가야 수확이 잘 돼요.

깊이 들어가면 수압 때문에 귀가 잘 안 들려서 바닷속에서는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요. 수면 위로 올라와서 “만날 숨벼도 보말 졸안 못 잡으켜게. 우리 쉬어가불게(매번 깊게 들어가도 보말 작은 거밖에 없어서 못 잡겠어. 우리 쉬자)”라고 얘기하죠.

미역을 많이 수확했던 옛날에는 미역으로 *망사리가 꽉 차면 일단 바닷물이 들지 않는 뭍까지 짊어놨어요. 너무 바다 가까이 짊어다 놓으면 파도에 다 휩쓸려 갔기 때문이에요. 물질이 끝나면 바다에서 나와서 해녀복을 입은 채로 미역을 옮겼어요. 우리 마을은 바다와 미역을 말릴 수 있는 잔디밭까지의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우선 중간까지 짊어다 놓고 나서 다시 잔디밭으로 짊어지고 갔어요. 씻고 해녀복을 갈아입고 난 후에는 잔디밭에 옮긴 미역을 널어 밤 동안 말렸어요. 바싹 마른 미역을 집으로 옮겨 보관하다가 상인이 오면 그 미역을 팔았죠. 

선배 해녀들은 어떻게 도와줬는지.
선배 해녀나 물질을 잘하는 상군 해녀는 초보 해녀와 하군 해녀를 위해 상대적으로 깊은 바다에서 물질을 했어요. 하군 해녀의 구역, 중군 해녀의 구역, 상군 해녀의 구역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죠. 하군 해녀가 수확할 수 있도록 일부러 가깝고 얕은 바다에는 들어가지 않고 멀리 나갔어요. 또 나이가 들어서 활동량이 조금 떨어지거나 초보인 해녀들을 위해 잘하는 해녀가 미역을 따서 한 망사리를 먼저 주고 본업을 시작하기도 했어요. 요즘은 이런 문화가 많이 허물어졌어요. 그런 면에서 요즘 해녀들은 박해졌다고 얘기하기도 해요.

해녀를 하면서 힘든 점이 있었다면.
해녀가 바다에 들어가서 버는 돈은 ‘저승돈’이라는 얘기가 있어요. 저승에서 벌어서 이승에서 쓴다는 말이죠. 그만큼 해녀 일이 고달프고 힘들어요. 옛날에는 해녀 일도 하면서 밭일도 나가고 하니까 안 아픈 사람이 없었어요. 바닷속으로 깊게 잠수해서 들어가면 수압 때문에 귀가 많이 아파요. 그래서 해녀를 오래 한 사람들은 귀가 잘 안 들리고 머리도 많이 아파요. 잠수병에 많이 걸리죠. 저도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주변 사람들이 크게 말해야 해요. 

가장 힘들었을 때는 서른 다섯 살 즈음 남편이 남영호 침몰사고로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때예요. 그 당시에 시신도 찾을 수 없어서 몇 날 며칠을 돌아올 남편만 기다렸죠. 남편 없이 해녀 일로 돈을 벌어서 3남 1녀를 키우느라 많이 힘들었어요. 집에서 남편을 기다리고 싶어도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낮에는 바다에 나가서 일하고 밤에는 집에 돌아와 계속 울었죠. 정말 힘들었어요. 그래도 그때 해녀를 하면서 번 돈으로 자식들을 키우고 대학까지 보낼 수 있었죠. 

해녀들의 문화로는 어떤 것이 있나.
매년 정해진 기간 동안 영등제를 해요. 영등제는 그해 동안 해녀가 많은 해산물을 수확할 수 있도록 신에게 비는 행사예요. 해녀는 바다를 관장하는 요왕신을 최고의 신으로 믿어요. 그래서 그동안은 제주도 전 해녀들이 바다에 가지 않고 요왕에게 소원을 빌어요. 물질을 나가지 않고 음식을 만들어서 요왕에게 바치죠. 영등제가 시작되면 돼지고기 자체를 입에 안 댈뿐더러 냉장고에 있는 돼지고기도 다 비워야 해요. 예전에는 상갓집도 갈 수 없었어요.

해녀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불턱’도 있어요. 불턱은 해녀들이 물질을 하고 나왔을 때 따뜻하게 몸을 녹이면서 쉬는 공간이었어요. 불턱 가운데 장작을 때서 불을 피운 다음 해녀들끼리 수다도 떨고 채취해 온 해산물을 구워 먹기도 했죠. 지금은 물질이 끝나면 씻을 수 있는 해녀 목욕탕이 있지만, 그때는 목욕탕도 없어서 집에서 따뜻한 물을 병에 담아 가지고 갔어요. 물질이 끝나면 그 물로 불턱에서 간단하게 몸을 씻었죠. 불턱은 해녀들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정말 고마운 공간이었어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 우리 마을에서 56살 해녀가 가장 젊은 해녀예요. 해녀가 힘든 직업이기 때문에 기피하는 것도 있지만 해녀 등록을 하려고 해도 수협이나 해녀회에서 잘 허가해주지 않아요. 해녀들이 점점 사라지면서 제주도 해녀 문화가 결국 사라지게 될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해녀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한테 해녀를 하라고 독려하고 응원해주고 싶어요. 

그만둬도 될 나이지만 집에서 계속 있으면 심심하기도 하고, 계속 놀기만 하면 치매에 걸릴 것 같아서 바다에 꾸준히 나가서 해녀 일을 하고 있어요. 바다에 나가 다른 해녀들이랑 얘기하면 즐겁기도 해요. 이제는 돈을 벌기 위해서 물질을 나간다기보다 바다에 가면 시원한 바람도 맞고 건강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계속 나가요. 이번에 점을 보러 갔을 때 ‘해녀를 백 살까지 하겠다’라고 얘기하니 아흔아홉 살까지 하고 그 이상으로는 절대 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래서 딱 아흔아홉 살까지는 바다에 가서 해녀를 할 거예요. 

*테왁=해녀들이 물질할 때 기본이 되는 도구로, 가슴을 얹고 헤엄치는 데 쓰는 것.
ᄏᆞᆨ박=쪽박(작은 바가지)의 제주 방언.
*물질=해녀들이 바닷속에 들어가서 해산물을 따는 일.
*까부리=물수건 대용으로 썼던 모자. 방한모와 비슷한 형태에 목에 넓게 프릴을 한 모자.
*망사리=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을 넣어두는 그물망.

사진 I 김정현 기자 jhyeonkim@skkuw.com
사진 I 김정현 기자 jhyeonkim@skkuw.com
해녀들이 물질 나갔을 때의 모습.사진 I 김정현 기자 jhyeonkim@skkuw.com
해녀들이 물질 나갔을 때의 모습.
사진 I 김정현 기자 jhyeonkim@skkuw.com
해녀들이 쓰는 도구.사진 I 김정현 기자 jhyeonkim@skkuw.com
해녀들이 쓰는 도구.
사진 I 김정현 기자 jhyeonkim@skkuw.com
해녀들의 쉬는 공간이었던 불턱.사진 I 김정현 기자 jhyeonkim@skkuw.com
해녀들의 쉬는 공간이었던 불턱.
사진 I 김정현 기자 jhyeonkim@skku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