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팬데믹 상황이 벌써 10개월 째, 전 세계 확진자는 무려 5560만, 사망자는 134만 명에 이른다.(11월 21일 오후 5시경 구글 통계) 사실 대략적인 통계일 뿐이다. 직접적으로 코로나 때문에 죽은 사람들 뿐 아니라 그 파생 효과로 다른 병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생을 마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또 코로나 사태가 어린이, 여성, 장애인 그리고 세계의 가난한 이들의 삶에 어떤 파괴적 효과를 내고 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바이러스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소리는 이제는 잘 들리지 않지만, 감염도 치료도, 죽음도, 삶도, 평등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재난 이전의 삶이 지극히 불평등한 것이었는데 이런 큰 위기 와중의 삶이 평등하리라는 생각 자체가 엉터리일 것이다. 한국에서도 중산층 이상의 계층이나 정규직 직장을 가진 이들은 위기를 그럭저럭 버텨나가고 있다. 마스크를 써야 하는 것, 여행과 회식을 자제하는 것 정도를 갖고 엄살을 떨 수 없다. 코로나 이후 자살률이 다시 늘고(특히 20-30대 여성 자살자 수가 급증하고 있다한다.) 올해 실업급여는 무려 70% 넘게 급증하고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이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끼니를 챙기지 못하는 청년층이 있다는 믿기 어려운 뉴스도 들린다. 그렇다면 ‘K방역의 성공’이란 상대적이고 자위적인 이야기일 뿐이지 않을까?  

엄청난 불평등과 재난이 눈앞에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극복을 위한 방책으로 ‘연대’를 화두로 삼고 있다. 옳고 당연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진짜 ‘연대’의 의지는 과연 누구에게 있으며 실제로 어떤 연대가 행해지는지 묻는다면 막막해진다. 

안토니오 구테레스 UN사무총장이 코로나19 대응과 관련해 각자도생하고 있는 회원국들의 행태를 비판한 것처럼 국제 공조는 사실 미미하며, 개별 인간의 차원에서도 ‘거리두기’는 연대와 돌봄과는 기본적으로 모순이다. 그럼에도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의 저자 스티븐 핑커의 말처럼 인간의 양면 중 선하고 합리적인 쪽에 기대어, 같이 재난을 극복하자 말할 수밖에 없다. 매일매일 사투를 벌이며 ‘돌봄’을 수행하는 의료진이나 공무원들, 그리고 택배 노동자들처럼 소비와 일상을 유지하도록 목숨을 걸고 일하는 이들 외에도 할 수 있는 연대와 공동체를 위한 시민적 행동의 양식이 필요하다. 그중 하나가 마스크 끼기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마스크 논쟁’이 분분했고 여전히 많은 이들이 거부감을 갖고 있지만, 아시아 나라들이나 한국사회에서 마스크는 ‘연대와 이타’ ‘동양적인 미덕’의 상징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하지만 기실 마스크끼기는 수동적인 일이며, 어쩌면 마스크는 각자도생식 방역정치의 핵심일 것이다. 이 각자도생은 서구적 개인주의와는 다른 방향의 개인주의다. 내가 남에게 폐 끼치기 싫어서 마스크를 끼는 것을 똑같이 타인에게도 요구하는 것이다. 이 정도의 상호작용을 통해 우리는 결과적으로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실행하게 된다. 그 이상은 아니다. 이는 적극적인 ‘돌봄’이나 ‘연대’와는 거리가 있다. 

최근의 코로나 확산세는 매우 아슬아슬하다. 마스크를 더 열심히 끼는 일을 넘는 ‘참여’에도 계속적인 민주적 합의와 시민적 동참이 가능한가에 많은 것이 달려있다. 모임과 영업, 종교 행사 등을 자제하는 일은 마스크 끼기 다음 단계의 ‘참여’다. 정부에 대한 신뢰와 다른 시민들에 대한 상호 신뢰는 시민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힘이며 방역 성공의 결정적인 힘이다. 방역과 민주주의의 관계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