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선정 기자 (sunxxy@skkuw.com)

늦은 밤 신문사는 적막하다. 타자 소리만 울려대는 이 공간엔 문화부 김선정 기자라고 적힌 명함이 놓여있다. 내 이름 뒤에 적힌 까만 두 글자, ‘기자’로서 사람들을 만났던 기억이 스쳐간다. 

1665호에서 인터뷰했던 작가는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면 대부분 아는 사람이다. 예고시절 그의 작업이 좋아 그가 쓴 책을 자주 읽었다. 사실 평소에 그에게 궁금한 것은 준비한 질문보다 더 세세한 것들이었다. 전시장에서 관람객의 동선은 어떻게 고려하는지, 작업이나 주제를 명료화 시키는 방법, 나아가 한국에서 예술로 밥벌이하려면 어떻게 하는지. 하지만 지면에 담아야 할 것은 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내용이어야 했다. 독자는 미대생이 인터뷰를 빙자해 작가에게 한 고민 상담을 읽고 싶진 않을 테니. 하지만 상투적인 질문을 던지긴 싫었다. 어쩌면 ‘내가 이만큼 고민했어요’를 팍팍 티 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질문에 어설프게 공부한 현대미술에 대한 지식이 엉겨 붙었다. 두서없는 말을 앞에 앉은 그에게 쏟아냈다. 몇 번이고 그가 전시를 열었을 커다란 갤러리에서, 기자와 미대생 사이 어딘가에 있는 내가 말했다. “저도 졸업전시를 준비하며 고민이 많았는데 작업적으로도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무언가 민망한 마음에 꾸벅 인사하니 웃으며 답했다. “마스크 잠깐 벗고 얼굴이나 한번 보여줘요, 나중에 어딘가에서 만나면 알아보게.” 

나를 학생기자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면 아마추어처럼 보는 것 같아 괜스레 초라해졌다. 그러다 학생기자라는 방패에 숨는 순간도 있었다. 기사를 위한 자문을 할 때 엉성한 질문을 하면, ‘학생기자니까 이해해주겠지’라며 둘러댔다. 기자든 학생기자든 나를 칭해줄 그 무언가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어딘가에 포함된다는 소속감은 발언에 자신감을 실어준다. 소위 ‘공신력’ 있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들어 줄 ‘사람’이 있다고 아는 것(물론 이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게 슬프다). 허나 여기에는 책임감도 따른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회의를 하고, 많은 사람이 달라붙어 교열한다. 기사를 쓰다 해가 뜨면 “이렇게 열심히 쓰는데 누가 알아주기나 할까?”하는 불평도 어쩌면 그 소속감의 방증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삐뚤빼뚤하게 기자라 적힌 우스운 완장을 차고 두 학기를 보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이 완장을 반납해야 한다. 당분간 달콤한 소속감을 느끼긴 힘들 것이다. 돌려주면 별로 받고 싶지는 않은 ‘취준생’이란 명찰을 달아준다. 아직 이 명찰로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하기 어려울 것 같다.  

수습기자 교육을 준비하며 트레이닝북을 펼쳤다. 나의 수습 시절에 쓰고 싶은 소재를 적은 메모를 발견했다. 아쉽게 기사로 나가지 못한 이야기들이 눈에 띈다. 이제 PD가 내 이름 뒤에 붙을 수 있게, 그 이름표로 좋은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게 이 소재들을 예쁘게 다듬어 놓아야겠다. 
 

김선정 기자
sunxxy@skku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