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인터넷 서핑 중에 우연히 마주친 어느 초등학생의 일기 한 토막. 

“방학이 길어지자 엄마들이 괴수로 변했다. 그중에서 우리 엄마가 가장 사납다. 그래서 나는 아주 두렵고 무섭다. 그래서 나는 아주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또박또박 눌러쓴 무딘 연필 글씨를 읽어 내려가면서 나는 빵 터졌다. 코로나19 때문에 뜻하지 않게  삼시 세끼 재택 아빠와 아이들, 그리고 그 뒷바라지에 허덕이는 엄마가 빚어내는  코로나 블루의 한 장면이 생생히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쳇말로 ‘웃픈’ 웃음이었다. 

사상 초유의 흑사병을 1347년부터 수세기에 걸쳐서 반복적으로 겪은 전근대 유럽에서는 역병이 돌 때마다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다. 일단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면 마을을 폐쇄하고 출입을 금지했다. 그것을 어기면 사형에 처했다. 길거리 동물들은 모조리 척살 당했다. 그 다음엔 마을을 네 등분의 구역으로 나누고 감독관, 그리고 각각의 구역을 관리하는 행정관과 야경꾼을 임명했다.  이런 준비가 끝나면 정해진 날에 모든 마을 주민들은 집에 가두고 행정관이 대문과 현관문을 폐쇄했다. 각목을 대고 대못을 박거나 자물쇠를 채우고 열쇠를 모조리 수거해서 감독관에게 맡겼다. 모든 생활물자는 주민들 각자가 알아서 처리해야 했다.  빵과 포도주는 현관문에 나 있는 조그만 감시구를 통해서 행정관이나 야경꾼으로부터 공급받기도 했다. 역병이 끝날 때까지 온 마을에 이동이 가능한 사람은 감독관, 행정관, 야경꾼밖에 없었다.  죽은 시체나 혹은 거의 죽어가는 환자가 발생하면 푸른 십자가 표시를 문 앞에 걸어두었고 그러면 시체처리자들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 처리했다.  

그러나 이들이 견뎌야 할  또다른 시련에 비하면 격리의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을을 완전히 장악한 감독관과 관리자들의 감시와 횡포를 피해서 하루하루를 무사히 목숨을 지탱하는 일이 무엇보다 힘든 일이었다. 관리자들이 문을 두드리면 감시창을 열고 모든 식구가 그 앞에 일렬로 서서 점호를 받았다. 어떤 질문이든 관리자에게 솔직하게 대답해야 했고 거기에 사생활이나 사적 정보보호 같은 개념은 전혀 없었다. 물론 역병의 진행상태, 사망자 발생과 처리 등을 위해서 주어진 완장권력이었다. 그러나 이 완장권력은 격리되어 있는 주민들에게는 멀리서 통치하는 왕의 명령보다 더 강한 권력이었고 횡포가 되기도 했다.  마을 주민의 모든 움직임과 말은 낱낱이 감시되었고 이웃주민의 행동이나 불평마저 크로스체크(Cross-check)되었다. 이쯤 되면 폐쇄된 이런 공간에서 어떤 불행한 일들이 벌어질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평소에 완장권력을 찬 자의 눈에 거슬리던 자들의 운명은 추풍낙엽처럼 스러져 갔다. 서로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던 이웃주민들 간에도 참소가 벌어지고 어떤 이들은 마녀나 사탄 추종자로 몰려 화형에 처해졌다. 이러한 감시와 처벌의 반복된 과정은 초법적 권력만 강화했다. 

이런 상황을 두고 프랑스의 철학자 푸코(Michel Foucault)는 일상에서 ‘빵’과 ‘공간(혹은 이동의 자유)’이라는 단지 두가지 요소만 제한해도 인간을 동물처럼 훈육할 수 있다고 말한다. 왕의 권력까지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단지 뒷골목의 애들에게 완장만 채워줘도 인간을 동물처럼 훈육하는 일은 가능하다. ‘격리 속에 있는 마을주민들’처럼 말이다. 독일의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Rules for the human park, 2002)에서 이러한 메카니즘을 ‘사육(domestication)’이라고 표현한다.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에는 그들이 어떻게 사육당하는지 그 과정이 풍자적이고 냉소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방역을 위한 격리는 곧 국민보건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것은 언제나 정치적이었고 국민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육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었음도 명백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