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박다솜 기자 (manycotton@skkuw.com)

인터뷰 - 한국전쟁전후진주민간인피학살자 유족회 정연조 회장

영문도 모른 채 스러진 보도연맹 희생자 - 고통은 연좌제로 이어져

아직도 미비한 유해발굴과 진상규명, 꼭 이뤄져야 해

2002년 9월 4일 태풍 ‘루사’가 지나간 후, 마산합포구 진전면사무소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태풍 때문에 파헤쳐진 흙 밑에서 유골로 보이는 조각들이 발견됐다는 것. 한국전쟁 시기에 학살된 진주지역의 국민보도연맹(이하 보도연맹)사건 희생자들은 이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진주 보도연맹사건 유족들의 증언을 엮어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을 발간한 ‘한국전쟁전후진주민간인피학살자 유족회(이하 진주 유족회)’의 정연조 회장을 만나봤다.

 

잊어서는 안 될 참혹한 과거, 국민보도연맹사건
‘보도연맹’은 제1공화국 시절 우리나라의 공산주의 세력 약화를 목표로 좌익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정부의 주도로 설립된 *관변단체였다. 좌익경력자가 주 가입대상이었지만, 면장이나 구장이 쌀이나 비료 등으로 일반 주민을 회유하거나 주민의 도장을 도용해 당사자도 모르는 상태에서 보도연맹에 가입시키기도 했다.

정부는 보도연맹원에게 사상을 전향하면 국민으로 인정하고 보호해줄 것이라고 했으나, 실제로는 보도연맹원이 언제든 ‘빨갱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요시찰 대상으로 감시·취급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전 대통령은 보도연맹원이 북한군에 협력할 수 있다고 여겨 군과 경찰에 이들을 구금·연행하라고 명령한 뒤, 전세가 불리해지자 살해하라고 명령했다. 6월 25일부터 9월 중순쯤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전국 수십만 명의 보도연맹원이 목숨을 잃었다.

금방 돌아오겠다던 아버지는 영영 돌아오시지 않았다
이러한 보도연맹사건의 희생자들은 대부분 영문도 모른 채 경찰서에 갔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진주 유족회가 발간한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에 따르면 이주택 유족은 “이장이 지서에서 잠시 물어볼 게 있다며 참석해달라 해서 형님이 자발적으로 집을 나섰고 그 후로 돌아오시지 못했다”고 증언했고, 강성헌 유족은 “아버지가 몸을 씻고 있는데 군인 둘이 총을 들고 와서 아버지를 현장에서 바로 연행했고, 가족들이 왜 그러냐고 물으니 보도연맹에 관한 조사가 있어 조사만 하면 바로 보낼 것이라고 얘기했다”고 증언했다.

대대로 이어진 빨갱이의 낙인 : 연좌제
보도연맹사건의 피해는 희생자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제1공화국 이후 1980년대까지 정부는 보도연맹사건으로 사망한 사람의 가족과 친척까지도 요시찰 대상으로 분류해 감시했다. 김승일 유족은 “우리가 이사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반드시 형사가 찾아와 확인하고 가곤 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또한 이들은 취업에 불이익을 겪는 등 연좌제로 인해 고통받기도 했는데, 국가를 배신한 빨갱이라는 주변의 시선도 합쳐져 유족들은 사회에서 소외와 차별,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박탈감 등을 짊어지고 살아야만 했다.

정 회장은 군대와 사회 모두에서 연좌제로 인한 피해를 겪었다고 했다. “행정병 근무를 위한 교육도 완수했는데 신원조회에 문제가 있어 어쩔 수 없이 강원도에서 소총병으로 군 생활을 보내야 했어요.” 정 회장은 진양군 공무원 시험과 여권심사에서도 연좌제를 경험했다. 공무원 시험에서는 3등으로 합격을 하고도 아버지가 보도연맹 가입자라는 이유로 탈락했고, 현대건설의 해외 파견 근무 시험에 합격한 뒤 사우디아라비아에 가기 위해 여권심사를 신청했을 때도 연좌제가 적용돼 신원조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정 회장은 “당시 하루 일당이 2천 5백 원이었는데, 10만 원을 내고서야 겨우 신원조회를 통과할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유해발굴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진주 유족회는 2008년 출범한 이래 지금까지도 진주지역의 유해발굴과 위령탑·추모공원 건립 등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오고 있다. 정 회장은 “진전면 여양리에서 발굴된 유해 163구와 문산읍 상문리·명석면 용산리에서 발굴된 유해 약 80구를 용산리 진주 민간인 희생자 유해 임시 안치소에 모셔왔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 회장은 “아직 파보지 못한 유해 매장 추정지가 진주에만 16곳이 있다”며 “예산을 지원받지 못해 유해가 있는 걸 확인하고서도 아직 발굴하지 못한 곳도 많다”고 덧붙였다. 

인터뷰를 진행한 용산리 유해 임시 안치소 밖에도 발굴하지 못한 학살터가 있었는데, 진주 유족회 관계자가 학살터에서 무언가를 주워들어 기자에게 내밀었다. 흰 단추였다. 그는 “비가 오거나 하면 이렇게 옷가지나 단추 같은 게 지금도 나온다”고 담담히 설명했다. 정 회장은 “매장됐던 유해가 비로 인해 유실돼 대마도로 흘러가는 등 온전한 유해수습을 할 수 없는 처지”라며 고충을 밝혔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정 회장은 “정부의 직접적인 사과와 공소시효가 지난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수사가 이뤄져야 한다”며 “유해를 발굴해 가족의 품으로 돌려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전했다. 또한 “이러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역사교육을 공고히 해야 한다”며 “국가권력의 조직적인 위법행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배제하도록 형사소송법도 개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간신히 드러난 민간인 학살 사건의 희생자가 다시 땅속에 묻히지 않도록 우리가 꾸준히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관변단체=정부의 지원금과 보조금으로 운영되는 비영리단체.

 

ⓒyes24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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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리 유해 임시 안치소에 안치된 유해의 모습사진 l 박다솜 기자 manycotton@skkuw.com
용산리 유해 임시 안치소에 안치된 유해의 모습.
사진 l 박다솜 기자 manycotton@skkuw.com
용산리 유해 임시 안치소에 유해가 담긴 플라스틱 박스가 빽백이 쌓여있다.사진 l 박다솜 기자 manycotton@skkuw.com
용산리 유해 임시 안치소에 유해가 담긴 플라스틱 박스가 빽백이 쌓여있다.
사진 l 박다솜 기자 manycotton@skkuw.com
학살터에서 발견된 희생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흰색 단추.사진 l 박다솜 기자 manycotton@skkuw.com
학살터에서 발견된 희생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흰색 단추.
사진 l 박다솜 기자 manycotton@skku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