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박다솜 기자 (manycotton@skkuw.com)

전국의 민간인 학살을 체계적으로 조사한 최초 사례 … 2기 출범 앞둬

1기의 시행착오 극복해 진정한 진상규명으로 나아가야 

지난 5월 20일, 국회 본회의에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 개정안이 의결됨에 따라 2010년 활동을 종료했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가 다음달 10일 재출범한다. 우리나라 민간인 학살의 진상을 규명한 진실화해위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과거사 규명을 위해 어떠한 노력이 필요할지 짚어본다.

4·19가 촉발한 첫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노력
우리나라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노력은 민간에서 시작됐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면서 한국전쟁 전후 정부가 행한 민간인 학살 사건의 진상규명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나타났다. 전국 각지에서 유족회가 결성돼 진상규명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며 전국 단위의 유족회가 출범하기도 했다.

이에 1960년 5월 23일, 국회에서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구성돼 11일 동안 한국전쟁 전후 국가가 자행한 △경상남·북도 △전라남도 △제주도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조사했다. 하지만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유족회의 간부들이 반국가 행위죄로 혁명재판에 회부됨에 따라 유족회는 해체됐고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노력은 사그라들었다. 한국전쟁후민간인희생자전국유족회의 김복영 회장은 “(정부가) 위령비와 비석을 망가뜨리고 산소에서 파낸 시신에 불을 질러 훼손했다”며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진상 재규명을 위해 진실화해위가 문을 열다
지난 20일 대전 골령골에서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희생자의 유골 봉안식이 거행됐다. 지난 9월 20일부터 이번달 19일까지 진행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사건 9차 유해발굴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이다. 골령골 유해발굴은 2007년 진실화해위가 처음으로 34구의 유해를 발굴하고 2015년 민간인 공동조사단이 20구의 유해를 발굴한 뒤 5년이 지나 재개된 것으로, 42일 동안 250여구의 유해가 수습됐다.

이처럼 오늘날까지 민간인 학살 사건의 진상규명 노력이 꾸준히 이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진실화해위의 노력이 있었다. 진실화해위는 체계적인 과거사 진상규명을 목적으로 2005년 12월 1일 출범했던 국가기구다. 1980년대 일어났던 민주화운동 이후 유족의 과거사 진상규명 노력이 활발해져 1999년과 2000년에 각각 거창사건과 제주 4·3사건의 특별법이 제정됐다. 이처럼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이 조금씩 이뤄지기 시작했으나, 정식적인 조사가 이뤄진 적은 없었다. 이후 이어진 시민들의 요구에 따라 국회는 은폐된 진실을 밝혀내 과거와 화해하고 미래로 나아가겠다는 목적으로 진실화해위를 출범시켰다.

진실화해위는 4년 2개월 동안 1만 1175건의 조사를 시행하고 7196건의 민간인 희생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또한 강제성이 없는 특별위원회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정부에 △국가의 사과 △유해발굴 △위령사업 △희생자의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 등을 권고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김동춘 교수는 “진실화해위의 권고가 있었기에 지금까지도 지자체가 유해발굴 활동을 하는 등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위한 지원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첫 시도, 아쉬웠던 결과
그럼에도 진실화해위는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분야를 체계적으로 파고든 최초의 조직이었기에 많은 어려움과 시행착오를 겪었다. 우선 신고 중심으로 사건을 조사했기 때문에 실제 추정 사건 수보다 신청 규모가 아주 작았다. 진실화해위 설치 후 1년간 접수된 1만 755건의 규명 신청 중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사건은 8176건이었다. 학계가 추산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희생자가 50만 명에서 100만 명에 이르는 것을 고려하면 신청 규모가 아주 작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 교수는 “제1기 진실화해위는 홍보 예산이 없어 사건 신청을 받는다는 사실을 다방면으로 알릴 방법이 없었다”며 “조사 결과 또한 언론을 통해 국민에게 홍보를 해야 하는데 1기 때는 잘 이뤄지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연좌제로 인한 불이익을 염려한 유족들이 사건 신청을 하지 못했던 문제도 있었다. 김 회장은 “많은 유족이 과거 수십 년간 연좌제로 트라우마를 겪어왔다”며 “진실화해위의 조사를 받으면 또 피해를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알면서도 신청을 하지 않은 유족도 많았다”고 덧붙였다.

짧은 조사기한도 아쉬움을 남겼다. 진실화해위는 활동 종료 후 조사기한을 2년 연장할 수 있었지만, 당시 *전원위원회는 조사기한을 2개월 6일 연장해 2010년 6월 30일 조사활동을 종료하는 것으로 의결했다. 기한이 빠르게 종료된 탓에 1046건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 사건이 6월 29일과 30일의 전원위원회에서 한꺼번에 처리됐다. 이는 당시 진실화해위에 접수된 전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 사건의 약 20%에 해당한다. 김 교수는 “짧은 시간 내 조사를 마무리 지으려다보니 충분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설명했으며, 김 회장은 “졸속 처리된 사건들의 추가조사가 이뤄져야만 진정한 진상규명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제2기 진실화해위가 마주한 숙제
한시적인 진실화해위 활동 후 위원회의 활동 재개를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가 꾸준히 존재해왔다. 이를 인지하고 있던 문재인 대통령은 ‘못다 한 과거사 진실규명 완수’를 공약으로 내걸기도 했다. 다음달 제2기 진실화해위가 출범하는 가운데, 미조사 사건을 해결하는 등 진정한 과거사 진상규명을 위해 해결해야 할 숙제가 많다. 김 교수는 “이번 제2기 진실화해위에서 조사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며 “끝을 낸다는 각오로 제1기 때 미처 해결하지 못한 민간인 학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피해자들의 배·보상 문제도 남아있다. 기존 과거사법 개정안 36조는 정부가 피해에 대한 배상 방안을 강구하고 위령사업 등의 적절한 조처를 해야 한다는 내용의 ‘피해자에 대한 정부의 배·보상 의무’를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각에서 피해자 배보상 비용에 대한 우려가 제기돼 과거사법은 36조를 제외한 채로 통과됐다. 김 회장은 “진실규명결정을 받고도 배상을 위해서는 국가에 소송을 걸어야만 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그런데도 많은 유족이 자료 부족이나 소멸시효 등으로 인해 소송을 기각당하거나 패소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유족을 위한 진정한 구제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전원위원회=진실화해위 위원 전원이 참석해 조사보고서를 심의·의결하는 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