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세계의 끝이 아닌 세계()의 끄트머리에서 - 듀나의 초기 단편들에 대해

나원영(철학 15)

 

1. ‘세계의 종말로 복도훈의 종말을 상상하기

문학평론가는 앞으로 누가 아프다고 쓰면 아프다고 부르르 떠는 사람이어야 하겠다.”고 썼던 복도훈이 그로부터 한 해 반 정도가 지난 후의 글에서 2019년의 한국 SF에 대한 감성의 물성을 다루며, “동시대 여성 서사가 독자들과 주고받는 감응(affect)이 남다르다는 것은 확실하다거나 그들의 소설을 읽는 독자들과의 정동적 연결의 측면에서 폭넓게 다룰 필요가 있다고 썼을 때의 느껴지는 강한 이물감에서부터 시작을 해보면 좋을 것 같다. 이 글의 여러 문장 중에서도 박문영의 지상의 여자들의 기본적인 전제를 남자들을 소거하는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이라는 표현으로 썼을 때에,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단어에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남자들의 소거를 어째서 ‘(포스트) 아포칼립스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의문은 프레드릭 제임슨을 패러디하기보다는 인용해서 전유한 니나 파워의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가부장제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더 쉽다는 문장을 세계의 종말로 가부장제의 종말을 상상하기라는 소제목으로 완전히 똑같지 않게 비틀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들었다. 여기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그것이 일단 더 쉽기 때문에)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으)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 사이엔 많은 차이가 있다.

 

근미래를 디스토피아적으로 다룬 SF 영화인 <칠드런 오브 맨>에 대해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경제 체계일 뿐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널리 펴져 있는 감각이 그것이다. 한때 디스토피아를 그린 영화나 소설은 이런 대안적 상상 행위의 연습이었고, 그런 작품이 묘사한 재앙들은 다른 삶의 방식이 출현할 수 있는 서사적 구실로 작용했다. (...) 이 영화가 투영하는 세계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아니라 우리 세계를 외삽했거나 우리 세계가 악화된 모습처럼 보인다는 피셔의 설명에 비춰 위 문장을 생각해본다면,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상상 행위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감각 혹은 현실 인식 속에서, ‘상상하기의 가능성은 오히려 세계의 종말쪽에 더 가까워진다. 여기에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종말은 그 대비를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쪽의 상상하기를 뛰어넘으며 상상되고 추구되어, “다른 삶의 방식이 출현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제시된다. 즉 도리어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으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종말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한편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기로 가부장제의 종말을 상상하기로 두고 보았을 때, 복도훈의 문장에서 드러나는 상상하기는 반대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종말에 더욱 가깝게 놓여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약간의 비약이겠지만, 뒤집어서 생각해보자면 이것은 결국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다른 쪽보다 더 쉽다고 받아들여지고, 더 나아가 진정으로 상상하거나 추구할 것은 세계의 종말이 되어버린 듯이 느껴진다. 여기에 다시금 지상의 여자들‘(포스트) 아포칼립스로 설명하는 의문스러운 전제를 가져와보고, 뿐만 아니라 작품이 아포칼립스의 양의성을 살려 누군가에게는 아포칼립스적인 상황이 누군가에게는 유토피아의 시작임을 드러낼 수 있다고 하거나 세상의 끝과 시작이 한국 구주에서 동시에 움텄으니까요라는 성연의 말 중 세상의 끝남자들이 사라진 후와 등치시키는 표현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복도훈은 지속적으로 작품 속 일부 남성들의 실종 혹은 소거를 무려 세상의 종말과 끝, 아포칼립스와 동일하게 두고 있다. 사실 너무 당연하지만, 지상의 여자들에서 일부 남성들의 실종은 절대로 세상의 종말이 아니며, 그 이후 또한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전혀 아니다. 세상은 그럼에도 여전히 계속된다. 끝을 맞은 것은 세상이 아니라 실종된 일부 남성뿐이다. 그렇다면, ‘세계의 종말이란 대체 무엇이었던 것일까.

 

재미있게도 11년 전 동일한 문예지의 특집 지면에서도 복도훈은 SF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 글에는 남자들을 소거하는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에 여러모로 부합할 흥미진진한 작품들을 끊임없이 써온 듀나에 대한 복도훈의 무질서한 인상의 목록들이 있다: “더 이상 자라지 않으려고 하는 영악한 소녀의 냉소적 웃음, 사물과 세계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중성적이고도 무심한 응시, 어떠한 관계에서도 감정의 잔여를 남기지 않으려는 한 독신자적 냉담함.” 이것이 얼마나 듀나의 서술자나 인물, 아니면 문체나 세계관을 의미 있게 진단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서 눈여겨볼 점은 복도훈이 듀나의 자기참조성과 더불어 (레비-스트로스를 빌려) ‘브리콜라주적이라 부를 수 있을 특징을 다음처럼 지적했다는 점이다.

 

듀나의 SF는 하나의 문화상품이 생산·유통·소비의 과정을 거쳐 하나의 장르문학으로 재활성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후기자본주의시대 문화논리의 산물이다. (...)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이 자기지시적 언급은 선배작가들로부터의 영향의 불안을 나타내는 한편, 표절 등의 저작권 문제에 대해 우회적이지만 정당한 방식으로 항변하며, 하나의 텍스트가 기성 문화생산품에 대한 해체와 재조립이라는 공정을 거쳐 나왔음을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이것은 듀나 SF의 자체 생산과정에도 동일하게 해당된다. 실제로 듀나에게서 이전 SF의 모티프나 설정은 다음 작품의 밑거름과 아이디어가 되는 식으로 상호텍스트성을 형성하며, 단편은 장편의 형태로 확장되기도 한다. 그래서 듀나의 SF상품의 자기복제와 증식이라는 생산과정에 대한 알레고리로도 독해 가능하다. 듀나의 SF상품화된 문화를 자기지시적으로 서사 내부에 기입하는 방식을 특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후기자본주의의 문화논리를 함축하며, 또한 그런 문화의 산물이다.”

 

자기지시와 자기참조, 기존 텍스트의 해체와 재조립, 상호텍스트성의 형성 등의 표현은 같은 장의 앞선 문단에 나온 기왕의 SF 장르 클리셰들을 조합해서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나가는 방식이라는 설명과 엮일 수 있을 것이며, 잠깐 앞의 글로 돌아가서 “SF는 기본적으로 메가텍스트적 특징, 즉 이미지, 배경, 모티프, 코드의 백과사전을 광범위하게 공유하고 그것들을 상호텍스트적으로 반영하는 문학 장르라 소개함에 있어 한국 SF의 주요 작가인 듀나의 소설에서도 잘 드러나지만이라는 첨언을 한 것을 염두에 두자면, 적어도 복도훈에게 있어 듀나의 일차적인 특징들은 2008년에나 2019년에나 그러한 메가텍스트성과 상호텍스트성을 기반에 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이렇게 추출된 특징들은 물론 느슨한 의미에서의 포스트모던에 대한 사회학적 환원 과정으로 소급되며 여기서 어떤 후기자본주의의 문화논리인가라고 물을 수 있겠다정치적 무의식의 탐구를 위한 디딤돌로 존재할 뿐이지만, 이 모든 부차적인 측면들을 제거하고 듀나의 SF적인 메가 혹은 상호 텍스트성과 더불어 그렇게 형성된 세계()의 형태에 집중해보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대본 밖에서, 각자의 시간 속에서같은 근작이나 제저벨을 둘러싼 이른바 링커 우주를 통해 마찬가지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상대적으로 초기작에 속할 면세구역태평양 횡단 특급의 작품들로 한정해서 다뤄보려고 한다.

 

2. 메가텍스트적 셀프-레퍼런스의 세계

SF 메가텍스트에 대해 비유와 기능적인 장치들에 특화된 상호텍스트적인 백과사전 내에서 생성되고 수신되는 방식이라 말하는 브로데릭의 설명은 그러한 메가텍스트성에 상호텍스트적 성격만이 아니라 이미 확립되어 있으나 어느 작가 개인에게 속한 것이 아닌, 서로 공유되는 이미지와 모티프의 특정 집합 내에서 작업하는 상황이 형성되며 각 이미지와 모티프의 새로운 반복은 확립된 의미와 연관성 둘 다에 의존하고, 또한 그것들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보이면서 어떤 단일 텍스트에 나타나는 것을 능가하는 서로 연결된 의미의 그물망을 생성해낸다는 것을 포함한다. 즉 추서영이 언급한 SF의 구성 요소들인 가공의 노붐, 미래의 역사, 상상 과학, 과학소설적인 숭고함 및 과학소설적인 기괴함과 테크놀로지에이드 등은 메가텍스트의 공공재로서 오랜 시간동안 다양하게 형성되고 분화한 모티프들을 끌어와서 각자의 방식으로 활용될 것이다.

 

, 애초부터 하나의 문화상품이 생산·유통·소비의 과정을 거쳐 하나의 장르문학으로 재활성화되는 과정이나 하나의 텍스트가 기성 문화생산품에 대한 해체와 재조립이라는 공정을 거쳐 나왔음”, “상품의 자기복제와 증식이라는 생산과정등의 표현은 오로지 듀나에게만 적용된다거나, 조금 더 넓혀서 후기자본주의의 문화적인 산물만으로는 한정하기에는 어려운, SF 전체의 메가텍스트적 특징에 가까운 편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메가텍스트성을 듀나만의 특수 성향으로 두기보다는, SF의 가장 근본적인 성격으로 둔 다음 이 메가텍스트성을 다루는 듀나만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두었을 때 복도훈의 글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자기지시적언급 혹은 기입이다. 이것은 물론 듀나 본인의 작품들 사이에 느슨한 관계가 있다는 식으로 (말하자면 단편이나 중편을 모아 장편으로 만드는 기법으로” “각각이 독립된 서사이기는 하나, 전체적으로는 장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픽스-업 형태의 제저벨이나 배터리라는 기본적인 설정을 공유하는 것으로 알려진 아직은 신이 아니야민트의 세계처럼) 말할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듀나의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자기지시성은 단순히 메가텍스트에서 모티프를 활용했거나 마찬가지로 자신의 모티프를 확대시킨다는 정도로 설명하기에는 조금 더 많은 특징들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얼어붙은 삶의 서술자가 모 통신망 SF 동호회에서 파멜라 서전트나 조안나 러스, 옥타비아 버틀러와 같은 작가들에 대해 간단한 소개 글을 올리는 동안” ‘SF 평론가라는 어처구니없는 직함을 얻게 된 후 이후 좋게 말하자면 블레이더 러너의 따분한 표절작이었고 나쁘게 보면 남자 고등학교 화장실의 낙서처럼 더러웠(태평양 횡단 특급, 227)”SF 영화 제작의 자문으로 얽히게 되는 부분들이 있다. 물론 이것은 복도훈이 말하는 대로 후기자본주의 시대의 문화 생산물에 둘러싸인 브리콜라주적 창작 공정의 단면을 드러내는 서술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다르게 보아서 이것을 듀나가 수많은 문화생산물’, 그보다는 SF의 메가텍스트를 구성해온 수많은 작품과 텍스트를 블룸적인 영향에 대한 불안따위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그 자신의 텍스트 속에 삽입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텍스트 바깥을 잠시 내다보자면 애초에 듀나 자체가 실제로도 오랫동안 이어진 씨네필적인 관심으로 메가텍스트에 대한 온갖 지식을 쌓아 그만의 취향을 만들었다는 점을 염두로 두었을 때, 이러한 SF 내외의 메가텍스트를 오가는 취향의 직접적 삽입은 당연하게 느껴진다.

 

다만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듀나의 특징을 이야기하자면 이것은 단순히 메가텍스트에서 코드나 모티프만을 따와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더 나아가 아주 직접적으로 메가텍스트를 구성한 수많은 창작자와 그들의 작품, 온갖 클리셰와 모티프 등을 언급하고 인용하는 것부터 작품 전체를 추동하는 기본적인 설정이나 구성 자체로까지 꼼꼼히 집어넣는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하게도 듀나스러운 설정인) 영화관을 매개로 시간을 도약하는 혜나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 후반부에 등장하는 몇 문장들을 예시로 끌어와 볼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의 탄성, 시간 보존 법칙.” 혜나가 말했다. “SF 작가들이 남발하는 소도구들이지. 이미 우린 여기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지? 언젠가 네가 물었잖아. (...) 내가 떨어진 우주는 결코 코니 윌리스폴 앤더슨의 세계처럼 가볍게 진동하는 우주가 아니야.” (태평양 횡단 특급, 232. 강조는 인용자.)

 

나에게 한 가지 가설이 있다. 버피 다섯 시즌 첫 번째 에피소드인 버피 대 드라큘라에서 (...)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필립 K. 딕식 아이디어.” (태평양 횡단 특급, 236. 강조는 인용자.)

 

코니 윌리스스트루가츠키 형제는 너무나도 정교하게 인간들의 행동에 반응해서 마치 자아와 인격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자연 법칙들에 대해 썼다.” (태평양 횡단 특급, 237. 강조는 인용자.)

 

혜나의 시간여행에 대해 (듀나의 여러 작품들이 그러듯이) 그 나름대로의 이론을 만들어보고 이에 대해서 검증하며 유효성을 평가해보려는 시도들에서 둠즈데이 북으로 대표될 윌리스의 옥스퍼드 시간여행 시리즈의 과학 법칙들을 자아와 인격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정교한 종류라고 하며 혜나의 시간여행의 법칙들과 비교해보거나, “호러, 고딕 로맨스, 추리물, 하이틴 로맨스, SF, 액션, 코미디, 잉마르 베리만식 실내극, 심지어 뮤지컬까지 어우르는 방대한 장르 무대를 갖추게 되어버린 TV 시리즈 <버피>에서 기억을 추가하는 설정이 들어간 에피소드를 전형적인 필립 K. 딕식 아이디어라고 부르고, 그러면서도 SF 메가텍스트 속에서 아주 오랫동안 쓰인 시간 여행이라는 모티프를 활용하는 것 등은 작품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부터 잠깐의 농담으로 끌어오는 레퍼런스까지 듀나가 메가텍스트라는 거대한 연결망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조하고, 삽입하고, 인용하고, 활용하고, 변주하는지를 보여준다.

 

자기지시성이라는 단어는 이러한 맥락에서 사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니클라스 루만의 이론을 잠시 빌려와 보려고, 혹은 비약해 보려고 한다. 루만에게 있어 자기지시다른 것과의 구별의 맥락에서 어떤 것을 지칭하거나 혹은 하나의 구별에 따른 지칭하는 것으로, 그러한 지칭 혹은 관찰의 특성이 강조된다. 이러한 자기지시성에 대한 루만의 세 가지 설명을 사건들, 과정들, 그리고 체계 자체를 관찰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로 구분해 체계 안에서 일어나는 관찰의 세 층위가 나타난다고 파악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적용해보자면, 듀나의 자기지시성은 그렇게 주어진 거대한 메가텍스트의 그물망과 그 상호텍스트적인 연관 관계를 직간접적으로 삽입하며 적극적으로 창작하는 과정에서 마찬가지로 세 가지의 층위로 나타나며 서로가 합쳐진다. 텍스트 안에 인용되는 특정한 텍스트 자체의 층위, 그 텍스트를 스스로의 텍스트에 인용해오는 스스로의 인용 행위 자체의 층위, 더 나아가 그러한 인용 관계를 가능하게 만든 메가텍스트 전체의 층위까지, 여기에 어쩌면 SF 외적으로도 듀나의 취향이 형성한 조금 더 거대한 데이터베이스까지 상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듀나의 자기지시성은 그러한 메가텍스트-인용 행위-텍스트의 층위를 모조리 관찰하며 동시에 이를 텍스트의 층위 속에 삽입하는 것으로 지칭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기본적으로 텍스트의 안팎 세계와 관찰 행위 모두를 텍스트에 삽입하고 인용하며, 진지하게 변주하는 것부터 가볍게 농담하고 지나가는 것까지의 과정들을 다시 한 번 텍스트의 안팎 세계에서 지속적으로 반복하고 변주하는 것이 듀나가 거대한 텍스트의 세계를 대하고 이를 활용하는 방식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듀나의 세계는 메타적으로 관찰한 거대한 메가텍스트를 자기지시적으로 활용하고 여기에 더해 그 메타성과 자기지시성을 언급하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지고, 이 과정에 있어서 메가텍스트 속에서 활용된 상호텍스트성이 만들어낸 셀프-레퍼런스는 세계의 창작 행위인 동시에 구성 요소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히즈 올 댓은 단순히 듀나를 이야기하는 어떠한 입구이자 단초로만 두는 복도훈의 접근보다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 할리우드 하이틴 로맨스 영화들에 대한 나의 불건전한 애정을 폭로(태평양 횡단 특급, 309)”하는 듀나의 취향이 어떤 식으로 다른 메가텍스트들과 합쳐져 텍스트 안팎으로 빈정거리는 장르 패러디인지, 진지한 드라마인지, 아니면 초현실적인 판타지인지 감을 잡을 수 없(태평양 횡단 특급, 39)”는 작품이 된 다음 충돌하는 해석 혹은 개작들 속에서 읽히는 지로 해석해볼 수 있을 것이다.)

 

3. “우주가 거기에 신경이라도 써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 알아서들 생각하기 바란다.”

여기서 자기지시성에는 언제나 순환적이고 그러므로 어느 정도 폐쇄적인 성질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이것은 어떠한 자기폐쇄적인 리비도의 대리충족의 이야기가 아니라, 듀나의 몇 단편들 속 픽션적인 세계가 그러한 식으로 형성되었으며 이러한 세계의 순환성과 폐쇄성이 그 거주민들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이것은 다르게 말하자면 결정론 혹은 자유의지에 대한 이야기인데,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얼어붙은 삶으로 돌아가면 괜찮을 것 같다. 영화관을 통해서 시간 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가설을 검증한 혜나는 다시금 서술자와 만난 다음 적어도 그가 살고 있는 세계의 시간 여행 법칙이 어떻게 구성됐는지에 대해서 말한다.

 

난 역사를 바꿀 수 없어. 나 역시 그 역사의 일부니까. 내가 지금까지 느꼈던 무력감이 이해되지 않니? 단선 시간 속에서 우린 자유 의지에 대한 환상을 깨트리지 않고 살 수 있어. 하지만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엉킨 우주 속에서는 그게 통하지 않는단 말이야. 주변의 모든 우주 법칙이 나를 한 방향으로만 밀어붙이는 걸. 마치 전우주적인 꼭두각시극에 출연하는 것 같아.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할 때마다 모든 자잘한 우연의 일치들이 내 길을 가로막아.” (태평양 횡단 특급, 237. 강조는 인용자.)

 

혜나가 시간 여행을 통해 경험한 세계는 모든 사건들, 심지어 혜나의 시간 여행까지를 포함한 말 그대로 모든 존재하는 사건들이 역사적 흐름의 일부로써 고정되어 있는 세계였다. 즉 고정된 사건들로만 이뤄진 역사의 흐름으로 구성된 세계는 그 때문에 기본적으로 어떠한 새로운 힘이 개입해서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을 일으킬 수 있을 여지로 주지 않은 채 폐쇄적인 상태로 존재한다. 시간이 선형적으로 흐른다고 가정했을 때, 그에 따라서 이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 내의 모든 존재들에게 인과율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며, 이 인과율은 마찬가지로 자유의지로 연결될 것이다. 하지만 혜나가 경험한 시간여행과 고정된 사건만으로 구성된 시간은 자유의지에서 소급해 올라가며 인과율과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 모두가 단순히 이 세계에서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혜나가 말하는 자유 의지에 대한 무력감은 그런 점에서 폐쇄적인 세계에 대한 개입을 실패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이어지는 부분에서 서술자는 내가 지금 쓰는 글이 소설이라면 (태평양 횡단 특급, 234)”이나 하지만 나는 소설을 쓰는 게 아니다 (태평양 횡단 특급, 235)”라는 제법 의미심장한 문장과 함께 이러한 세계의 고정된 혹은 폐쇄된 성질에 대해 자신만의 가설 혹은 감상을 내놓으며 글을 끝낸다.

 

혜나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시간의 역류에 대해 이야기했다. 시간의 역류가 그렇게 흔하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시공간의 일부이리라. 우리의 우주는 그런 것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시공간이 자신의 구조를 안정시키기 위해 끝없이 자잘한 역류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상상한다. (...) 여기에는 궁극적인 목적이 있을까? 나와 혜나는 그 궁극적이고 신성한 목적을 위한 도구일까? 그럴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나는 그 목적인 인간의 역사와 관련된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아니, 나는 그것이 인간과 관련된 것이라고도 믿지 않는다. 물리 법칙은 인간과 총알을 차별하지 않는다. 우리가 무언가를 소중하게 여기고 꿈꾸고 갈망한다고 해서 우주가 거기에 신경이라도 써야할 이유는 무엇인가?” (태평양 횡단 특급, 237~8)

 

시간 여행 과정 중 역사 개변을 체험하지 못하는세계, 그러므로 어떠한 역류의 과정마저도 그 스스로의 흐름 속으로 포함시킬 수 있는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우주가 갖고 있는 폐쇄적이거나 고정된 성질은 시간의 선형적/단선적 흐름과 인과율에 얽힌 자유의지라는 환상을 부정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세계의 주민들에게 우주는 역사나 인간과 긴밀히 관련된 채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거기에 신경이라도 써야할 이유자체가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때문에 환상이 걷어진 상태에서 무력감이 찾아오는 것은 당연하며, 그것이 설사 지나가더라도 남는 건 여전히 완벽하게 무신경한 채로 존재하는 법칙, 우주 그리고 세계와 이 고정된/폐쇄된 세계 속에 존재하는 자신이다.

 

이러한 테마는 듀나의 여러 단편들에서 꾸준히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고 그에 따라 각기 다른 법칙에 따라 존재하지만 여전히 그러한 특유의 무신경함을 머금은 세계를 제시하는데, “1990년대 모 통신망 대화방에서 있었던 시간 여행과 자유 의지에 대한 토론에서 출발 (태평양 횡단 특급, 309)”했다는 설명이 붙는 만큼 얼어붙은 삶과 짝으로 둘 수 있을 도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이를 제시한다. 어느 날, 얼어붙은 삶의 서술자와 비슷하게 듀나의 픽션적 분신이라고 해도 무방할 소설가 이영수가 카페에서 작업을 하고 있던 중에 찾아온 한 남자가 자신이 다른 사람의 전생까지도 기억해낼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러저러한 사유의 과정을 거쳐 남자는 자신이 전생을 기억하고 있으며, 전생은 심지어 단 하나만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오락가락하며 지그재그 모양을 취하며 말 그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걸쳐 긴 테이프나 끈 (태평양 횡단 특급, 212~213)”처럼 얽혀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이 과정에서 이영수와 남자가 서로 그러한 관계에서 얽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배우 안나 파퀸부터 만화가 빌 워터슨까지의 리스트가 레퍼런스를 타고 총출동한 다음, 결국 지금 시점에서는 꽤나 예상 가능한 결론이 이어진다.

 

아시겠습니까? 이 지구상에 살았던 사람들과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 또 앞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저 하나입니다. 그들은 제 전생이거나 다음 생입니다. 시간의 얽힘 때문에 동시에 같은 장소에 존재할 수 있을 뿐이죠. 지구 역사는 원맨쇼에 불과합니다. 전 지금 선생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시간을 넘어선 독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평양 횡단 특급, 214. 강조는 인용자.)

 

물론 이에 대해서도 적어도 1990년대에는 그럭저럭 유명했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부터 파인만과 윌러가 제안한 입자에 대한 아이디어부터 인과율에 대한 점검이나 아서 클라크의 유년기의 종말까지가 남자가 설정한 가설에 대한 반증을 위해 튀어나오지만 이는 번번이 논파되고, 결국에는 얼어붙은 삶과 비슷한 류의 결론이 나온다. 여기에서 다만 다른 점은 얼어붙은 삶의 경우 시간 여행에서 고정된 사건에 개입할 수 없다는 법칙이 그 세계를 지배했다면, 의 경우에는 말 그대로 지구상에 존재한 모든 사람들이 서로 전생을 타고 전체론적으로 얽혀있다는 법칙에 따라 그 세계가 작동한다. 둘을 가볍게 비교하자면 의 세계는 그런 긴 끈의 형태로 모조리 이어진 채 선형적이지도 단선적이지도 않은 흐름 속에서 순환하는 법칙이 세계의 작동 원리이다. 이에 대해서 남자는 이 세계의 법칙과 형상, 그리고 그 속에 존재하는 인간들의 자유 의지에 대한 그럴 듯한 비유를 든다.

 

좋습니다. 이렇게 말해보기로 하죠. 저는 화가입니다. 제 앞에는 텅 빈 캔버스가 하나 앞에 놓여있습니다. 저는 여기다 물감으로 그림을 하나 그릴 겁니다. 하지만 여기엔 규칙이 있습니다. 그림을 고칠 수도 없으며 이미 물감을 칠한 곳에다 덧칠을 할 수도 없습니다. 처음에 제 붓 터치는 아주 자유로울 겁니다. 거리낌 없이 제 의지대로 캔버스를 칠하겠죠. 그러나 하얀 부분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터치는 점점 더 조심스러워지고 나머지 작업들은 제가 전에 거침없이 휘둘렀던 자유의지의 결과에 예속될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빈자리가 하나도 남지 않았을 때, ! 그림은 완성되는 거지요.” (태평양 횡단 특급, 218. 강조는 인용자.)

 

물론 두 작품 사이에 드러나는 세계의 법칙과 그에 대한 가설들, 그렇게 나타나는 세계의 형상과 이에 따라 제한되는 자유 의지의 모습 사이에는 여러 차이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은 단선적인 흐름이 적용되지 않는 시간과 이전만큼의 거대한 자유 의지의 환상이 마찬가지로 적용되지 않는 세계일 것이다. 재미있게도, 얼어붙은 삶에서 소설 혹은 픽션이라는 형식 혹은 설정에서 슬며시 미끄러지듯, 에서도 또한 서술자 이영수는 자신이 깨달은 진실 (혹은 거짓)을 알리기 위해 그렇다면 SF로 위장한 글이야말로 가장 좋은 수단이지요라고 말하는 남자의 조언에 따르고, “그 자리에서 그와의 대화를 생각나는 대로 옮겨 썼고 여러분이 지금 읽고 있는 글이 바로 그 글 (태평양 횡단 특급, 220)”이라고 말한다. 작품에 존재하는 세계와 그 바깥에 있는 세계를 이러한 식으로 겹치는 과정과 함께, 은 남자의 생각에 대해서 알아서들 생각하기 바란다. (태평양 횡단 특급, 221)”는 문장으로 끝맺는다.

 

알아서들 생각하라는 전언은 우주가 거기에 신경이라도 써야할 이유는 무엇인가?”하는 반문과 일치할 것이다. 두 작품 속에 등장하는 세계는 앞서 설명된 법칙들에 따라 일종의 순환적인 폐쇄회로처럼 내외부를 통튼 개입의 가능성이 닫혀있는 채 오로지 주어진 법칙에 따라서만 흘러가는 형상으로 이뤄졌으며, 이러한 세계 속에서 인과율과 자유의지는 단지 환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더불어서 의 경우에는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의 배후에 존재하는 힘으로 작용하듯이, 이러한 세계와 그 법칙은 그 안의 존재들을 혜나가 말하는 대로 모조리 전우주적인 꼭두각시극의 인형처럼 다루며 당연히 그 인형들 하나하나와 그 인형들이 어떻게든 모여서 만들어낸 작디작은 흐름이나 심지어 역류마저도 거대한 법칙 속으로 편입시키는 마찬가지의 조종자 혹은 배후로써 기능한다. 복도훈의 묵시록적이거나 종말론적일 정치적 무의식을 거쳤을 때, 이러한 세계의 법칙은 육체와 정신이 알 수 없는 대타자의 조종에 의해 꼭두각시처럼 움직이고 탈주체화되는 음모론의 세계라고 불린다. 여기서 복도훈은 음모론을 다시 제임슨을 참고해와 보통 자본과 국가와 같은 총체적 체제에 필사적으로 대항하려는 약자의 시나리오로 정의하며 비공개적이고도 비밀스럽게 진행되다가 어느새 그 가공할 만한 재앙의 결과를 사람들이 훨씬 나중에 깨닫게 만드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엄연히 현실을 지휘하는 픽션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식의 어떠한 음모론 서사를 언급했을 때 이것은 아마도 복도훈이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죽음과 세금외에도 어떠한 현실의 배후에 조종자나 여하튼 진실이 있다고 접근하거나 실제로 이 배후의 진실이 밝혀지는 구성의 작품들, 이를테면 (제목부터 대놓고 그러한) 꼭두각시들부터 미래관리부, 평형추같은 일종의 정치 스릴러들이나 사실 여기에 가장 잘 맞을 초단편인 A, B, C, D, E & F같은 작품들과 연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듀나의 작품들에서 그러한 배후의 조종자들을 가정하거나 설정하는 작품들은 미래관리부, 특히 꼭두각시들과 마찬가지로 결국에는 그 거대한 흐름 속의 모든 존재가 서로의 배후로써 연결되어 폐쇄적인 순환 고리를 만든다는 점에서 사실 진실이 밝혀지는 것 따위는 현실의 지휘필사적 대항에 있어서는 별 영향을 끼치지 않는 식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복도훈은 듀나를 비롯해 한국 SF에 등장해온 수많은 아포칼립스 서사에 (가라타니적인, 그리고 동시에 그 이후 끊임없이 비평에서 호명되어온) 종언이라는 정치적 무의식이 존재하며 그것이 현실을 지휘하는 큰 영향을 끼친다고 가정 하에 접근하지만, 오히려 이것은 그러한 사회학적 환원을 바탕으로 기본적인 전제로 삼기에 형성된 (그러므로 왜인지 비슷하게 음모론적으로 느껴지는) 독해라고 판단된다. 지상의 여자들과 관련해서도 말했지만, 세상은 그럼에도 여전히 계속된다.

 

이러한 얼어붙은 삶의 법칙과 세계, 그리고 이 속의 존재들에 대해서 뻗어나갈 수 있는 지점을 여기에서는 두 쪽으로 두고 싶다. 이러한 순환적 폐쇄회로 같은 특성을 듀나만의 존재론을 서툴게라도 정립해보기 위한 일종의 준거점으로 잡아본 다음에, 마찬가지로 순환적이고 폐쇄적으로 존재하게 될 세계의 법칙을 설정하는 다른 작품들을 찾아보기, 한편 그러한 배후의 진실을 알게 된 존재자들이 그러한 세계를 인식하고 사유하는, 달리 말해 존재하는 방식을 찾아보기. 전자를 위해 앞서 언급한 단편들을 좀 더 뜯어볼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재미있게도 태평양 횡단 특급보다 이르게 출간된 면세구역의 몇몇 세계 혹은 구역들에 잠깐 들려볼 것이고, 후자를 위해서 다시금 언급되었고 언급될 작품들로 돌아가 비교적 최근에 나온 복도훈의 또 다른 SF 비평을 이와 함께 점검해볼 것이다.

 

4. 세계()의 끄트머리를 향해 접근하라

에서의 전체론적이고 순환적인 폐쇄성과 얼어붙은 삶의 시간 여행 모티프가 결합하면 아마도 나비전쟁의 세계가 될 것이다. 물론 연대기적으로만 보자면 먼저 출판되어 등장한 단편은 나비전쟁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어떤 비선형적인 연대기의 틀을 적용한다면 면세구역의 듀나가 태평양 횡단 특급의 듀나를 참조했을지도 모른다는 바야르적 예상 표절을 상상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딸에게 아버지가 이 세상에 일어나는 사건들의 인과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면세구역, 45)”을 고백하는 동시에 그와 같은 능력을 가진 집단 사이의 인과와 시공을 뛰어넘는 전쟁이 알고 보니 고작 서로가 서로의 배후에 불과했으며 그 모든 계획자체가 무너져버려 고삐가 풀린 현재를 함께 고백하는 작품에서는, 고정된 사건으로만 이뤄진 역사의 흐름이나 전체론적으로 돌고 도는 전생의 끈처럼 순환적인 폐쇄회로 꼴인 세계상이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물론 여전히, 이 세계 또한 그를 가득 담고 있는 채로 그 존재자들에겐 어떤 신경도 쓰지 않는다.

 

천년왕국의 계획은 캐피만이 짜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우리 쪽 역시 그러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또 그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단지 그것이 캐피의 것에 비해 온화했고 더 시간을 끄는 것이었을 뿐이다. (...) 캐피 역시 그들의 천년왕국 계획의 일부였다. 심지어 캐피의 천년왕국 역시 우리의 천년왕국 계획의 일부였다. 그러나 캐피의 능력이 너무나 뛰어났던 탓에 캐피의 천년왕국은 거대한 특이상태가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예측된 흐름은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고 우리의 천년왕국 계획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신 여사는 이제 부서진 계획에 따라 움직일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모든 제약이 풀렸고 전면전이 시작된 것이다.” (면세구역, 59~60. 강조는 인용자)

 

코믹할 정도로 천년왕국이라는 시대착오적인 단어를 반복하는 점도 그렇지만 나비전쟁이나 얼어붙은 삶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아버지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 속에서 일방적으로 세계의 배후에 감춰진 진실이랄 것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앞선 두 단편에서 현실 세계의 듀나를 픽션 세계로 접속시킨 것 같은 서술자를 내세우는 것으로 남자나 혜나와 함께 우주의 법칙을 마주하고 가설을 세워보며 그들이 존재하는 세계란 어떤 곳이고 자신들이 이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야할지를 고민한다면, 나비전쟁의 아버지는 딸과 함께 그 어떤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이 세계가 이미 제약이 풀렸고 전면전이 시작된곳이라고 통보한다. 복도훈 식의 독법을 따라가 보면 바로 그러한 세계에 던져졌기 때문에 듀나의 인물들은 앞에서 열거한 무질서한 인상을 따라 영악하고 무심하며 한 소녀가 되어 종말을 통해 스스로의 리비도를 대리 충족하는 매정하거나 시니컬한 인물들이 되겠지만, 오히려 폐쇄적이고 순환적인 세계를 까발리고 무력감만을 안겨주는 냉담함은 그보다는 아버지의 마지막 메시지에서 더욱 느껴진다.

 

한마디만 하고 이 편지를 끝마쳐야 할 것 같다. 네 아버지는 너에게 미래를 주기 위해 싸우러 가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에게 이미 주어진 미래를 부수기 위해 떠난다. 내가 포기한다면 캐피는 안정되고 아름답고 영구적인 세계를 이 지상에 구현할 것이다. 내가 싸워서 만약에 승리한다면 나는 언제 핵폭탄이 터질지도 모르고 언제 지축이 바뀌어 지구를 아비규환으로 만들지 모르는 불안한 미래의 토막들을 너에게 넘겨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네가 주인이고, 네가 책임을 질 수 있는 미래이다. 내 딸아, 그것이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다. 얘야, 네가 미래를 볼 수 없다는 것을 고맙게 여기거라.” (면세구역, 60. 강조는 인용자)

 

이러한 세계의 작동 법칙과 형상을 알게 된 존재자들이 다시금 그런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방식을 갱신하는 것에 있어 얼어붙은 삶나비전쟁에 비해 다른 점을 이야기해봐야겠지만, 부득이하게 면세구역의 다른 구역들을 먼저 방문하고 오려 한다. 적어도, 이것을 어떠한 단서로 쥐고 나아가볼 수는 있을 것 같다.

 

다시 맨 앞으로 돌아가서, 지상의 여자들(부분적) 종말이라는 소재를 통해 정말로 필요할 종말을 상상하고 추구한다고 뒀을 때, 나비전쟁‘(마찬가지로 부분적일) 종말을 이용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제임슨의 상징적인 문장을 뒤틀어서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자유의지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더 쉽다로 이를 전유해본다면, 적어도 듀나가 설정한 나비전쟁에서 자유의지가 종말을 맞은 듯싶다가 전면전으로 확대된 세계에서 아버지가 딸에게 넘겨주려는 하는 것은 오히려 세계의 종말일 것이다. 다만 그렇게 자유의지 대신에 (부분적이더라도) ‘종말을 맞을 세계가 딸에게 있어서 아버지만큼의 전쟁을 감수하고서라도 지켜내고 싶은 세계일까? 여전히 그러한 세계에는 인과율의 법칙 바깥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이들이 오랫동안 계획해서 만들어놓은, 거대한 천년왕국인 만큼 개개인의 삶은 무의미한 계획을 알아차렸을 때만큼의 무력감이 가득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곳에서는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무력감도 절망감도 없이 존재할 수 있을까?

 

나는 이것을 세계의 끝이 아닌 세계의 끄트머리, 그리고 어떠한 두려움 없이 세계의 끄트머리로 접근하는 것이라고 상상해본다. 이러한 끄트머리는 인식론적이거나 존재론적으로 어떠한 너머배후따위를 상정할 수 있는 경계가 아니라, 말 그대로 그곳까진 주어진 세계가 전부라는 것을 지시하는 공간이다. 끄트머리 앞에서는 그 다음 혹은 그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까지가 세계의 전부다. 이것은 물론 끝없이 내려가는 절벽보단 오히려 끝없이 올라가는 꽉 막힌 방벽에 더 가깝게 비유해볼 수 있을 것이다. 끄트머리는 앞서 이야기된 세계 속에서는 역류까지도 포함시키는 흐름이 만든 필연적인 우연성이나 점차 채울 곳이 사라져가는 역사라는 캔버스의 남아있는 좁은 빈 공간, 오랫동안 조작되어온 자유의지가 풀려나고 전면전이 시작된 순간에 날아온 편지처럼 우주를 구성하는 법칙이 끝까지 되먹임을 거쳐 가속됐을 때 발생하는 사건이나 현상, 혹은 물체와 개념들이다. 세계의 끄트머리는 그러므로 전체론적인 순환성을 따라 폐쇄회로로써 존재할 수밖에 없는 닫힌 우주의 방벽이며, 듀나의 각 작품 속 인물들은 이렇게 저마다 다른 꼴의 닫힌 세계에서 끄트머리에 다다른다.

 

다시금 세계 자체로 돌아와서, 면세구역에서 이렇게 기존의 세계와는 다른 법칙과 방식을 따라 존재하는 세계는 면세구역이라는 상징적인 이름으로 나타난다. 짧은 작품 속에서 면세구역은 날이 어두워서 그런지 인기척도 뜸했고 번화가로부터 겨우 몇 십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치고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조용했다(면세구역, 11)”는 형우의 단순한 감상에서부터 기하학적으로 존재할 수 없었던 골목의 존재에 대한 서술자의 의구심, 뉴욕으로 이어진 경험이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면세구역에는 어떤 독특한 분위기가 감돈다. 복잡하면서도 어딘가 빈 듯한 느낌(면세구역, 18)”을 탐구하기까지로 이어진다. 재밌는 건 이 느낌이 간편하게도 말로 설명을 할 수는 없지만어쨌든 독특하다는 느낌을 통해 언어가 감각을 설명할 수 없다(면세구역, 17)”는 무소용으로 드러나는 점이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자면 기존에 언어를 통해 구축해놓은 인식 방법에서 엇나가기 때문에, 도저히 그러한 체계로써는 명확한 인식이나 그러한 사유도 불가능하다는 점이 면세구역의 특징이다. 앞선 단편들과도 비슷하게, 여기에서도 이 세계의 어긋난 틈을 영화관을 통한 시간 여행이나 기이하게 이어진 전생의 기억 따위의 끄트머리를 맞닥뜨리고 그를 통해 그러한 우주의 법칙을 알게 된 이들은 저마다의 가설을 만들어보지만, 마찬가지로 실패한다. (물론 얼어붙은 삶은 가설의 실패보다 심할지도 모를 무력감을 얻지만.)

 

그 사람 말에 따르면 복잡성은 자체적으로 증가한대요. 어떤 것이건 그 복잡성이 임계치를 넘어서면 여벌의 복잡성을 생산해내는 거죠. (...) 이 법칙은 너무나도 결정적이어서 심지어 물리학과 수학 법칙도 방해가 되지 않죠. 그러니까나는 갑자기 현기증을 느낀다. 2년 점 서점 건물의 8층 너머로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이후 나는 면세구역에서도 높은 곳은 잘 올라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면세구역의 존재는 일정 수준으로 커진 도시에서는 자연발생적이고요. 그곳을 선택받은 사람들이 발견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고요. (...) ?” 당신은 다시 입을 열고 또박또박 아까 한 말을 되풀이한다. 8층 창문에서 느꼈던 공간의 혼란과 같은 수준의 음향 혼란이 일어난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나는 당신과 같이 면세구역에서 태어난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당신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면세구역의 어휘는 나에게 현기증만을 유발한다. (면세구역, 19. 강조는 인용자)

 

면세구역에서 태어난 주민을 만나 그에게 자신이 들었던 이론을 설명하는 서술자는 면세구역의 높은 곳을 떠올리며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현기증의 감각을 느끼고, 이 감각은 면세구역의 주민인 당신의 말을 들을 때에도 똑같이 일어난다.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모든 것을 어떻게든 받아들여 보고자할 때 서술자가 느낀 현기증, 어떻게 말하자면 닫힌 세계의 끄트머리를 만났을 때 일차적으로 느낄 무력감과도 비슷할 것이다. 물론, ‘면세구역이 존재하는 세계가 폐쇄적이고 순환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여전히 세계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복잡성이 끝없이 생산되는 곳에서 너무나도 결정적인 법칙이 만들어놓은 서점 건물의 8층에서 마주했을 때의 아찔한 현기증에서 자꾸만 끄트머리에서의 무력감이 떠오른다. “언어가 감각을 설명할 수 없다는 표현은 그러므로 어쩌면 듀나가 이러한 단편들에서 제시한 세계와 그 법칙, 그리고 끄트머리를 마주한 존재들에게 가장 알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감각과 믿을 수 없는 무력한 현실 인식만을 주게 될 법칙을 어떻게든 언어라는 고약하고 버거운 체계로 설명하려 들 때, 이 언어와 세계를 가지고 그 속의 존재자들은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을 느낄까? 이 부분에서 다시금 복도훈의 글을 끌어올 필요가 있을 것 같다.

 

5.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나이다

제임슨과 바디우, 그리고 영지주의를 거쳐 세계화의 세계없음에서, 바디우의 표현을 빌리면 이데올로기의 종언 또는 이념의 종말 이후”, 혹은 이데올로기, 이념, 대서사의 종말, 즉 보편자의 기각 이후라는 익숙하게 종언론적인 정치적 무의식을 바탕으로 복도훈은 신체와 언어라는 개념들을 이야기하며 과학 소설을 세 가지로 분류한다.

 

“1. 신체와 언어, 바꿔 말하면 인종과 젠더, 민족 등의 신체적, 문화적 타자성에 환상적으로 매혹되고 그러한 타자(외계인이나 외계 등)와의 만남이나 경험 일체에 대해 서술하는 문화주의적 과학소설’ 2. 제임슨의 SF 소묘에서 드러난 것처럼 문화주의적 과학소설이 상상하는 다른 세계가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화라는 현재의 필연적인 연장, ‘세계 없음임을 비평하는 인지적 지도 그리기로서의 과학소설’ 3. 12가 절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최소한의 전제 아래, 세계의 필연성의 붕괴를 재현함으로써 세계 없는 세계와의 단절을 다양화하려는, 세계의 우연성을 재현하는 과학 밖 소설’”

 

이 때 메이야수는 당연히 과학 밖 소설의 측면에서 출현한다. 상관주의에 대한 사변적 실재론과 그 이후 등장하는 철학적 경향들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레 접근해보자면, 메이야수는 법칙들이 필연적이지 않다면 세계도 의식도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고 단지 일관성도 잇따름도 없는 순수한 잡다만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칸트적 상관주의에 반해 사실상 어떤 과학 밖 세계가, 심지어 그러한 세계들의 비일관성없이 상상 가능하다는 것을 추구하며, 더 나아가 그 세계들을 그 가능성이 부정될 수 없는 세계로 만듦으로써 - 그것들의 형이상학적 가치를 정당화하는 동시에 - 그것들을 소설적 골조가 [짜이는 것이] 가능한 영역으로 만듦으로써 - 그것들의 문학적 가치를 정당화하고자 시도를 펼친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학은 상관주의 혹은 과학적 법칙의 바깥에 있을 수밖에는 없다. 여기서 복도훈은 지극히 존재론적이고 물론 문학적일 메이야수의 시도를 정치적 무의식에 따라 종말론을 끌어와 사변적 실재론이 절대자에 대한 탐구를 어떠한 방식으로도 거부해온 상관주의가 신(형이상학)의 죽음, 이데올로기(역사)의 종말 이후에 도처에서 창궐하는 절대자에 대한 근본주의적 신념이나 광기가 열렬하게 부활하는 사태를 조금도 설명하지 못하고, 오히려 독단주의나 종교적 광신에 부합하는 사태를 비판하면서 제출된 것이라고 연결해서 두는데, 여기서는 일단 그가 한국의 과학 소설들을 앞선 세 분류를 염두에 두고 나눠보는 지점에서 듀나가 어떻게 위치되었는지를 향해 접근해 보려고 한다.

 

나는 한국의 과학소설도 대체로 앞서 제시한 두세 가지 과학소설의 양태를 구현해 왔다고 생각한다. 첫째, 타자성에 대한 환상적인 매혹(반발)과 그런 식으로 발견된 다른 세계와 (유사)인간을 그린 과학소설들이 있다. (...) 듀나의 경우, 젠더 정체성은 무수한 소설적 변주를 통해 미분화된다. 대체로 최근 한국의 과학소설은 듀나의 노선을 따라 젠더, 인종, 인간과 유사인간의 정체성 형상화에 몰두하고 있다. (...) 둘째, 세계의 세계 없음의 증상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인지적 지도 그리기로 형상화하는 과학소설(과학 밖 소설)이 있다. (...) 한국의 과학소설에서 이 노선은 귀하고 드물다. 셋째, 마이클스가 말한 풍속(계급)소설로서의 과학소설을 상상해본다. 그러한 과학소설에서는 정체성과 차이(신체와 문화)로 구축되는 과학소설의 유사인간과는 다른 유사인간을 상상할 것이다.”

 

바로 앞선 인용에서 복도훈 자신이 서두에 분류한 문화주의적 과학 소설 / 인지적 지도 그리기로써의 과학 소설 / 과학 밖 소설이라는 체계와 마이클스와 메이야수의 저작들에 대한 평을 거치고 난 다음 한국의 과학 소설을 분류하는 체계는 우습게도 서로 어긋난 채 충돌한다. 단순히 앞서 다뤄진 기표의 형태형이상학과 과학 밖 소설의 독해 이후로 그의 분류가 변화했다고 하기에 이 새로운 분류에서는 모든 정의나 구별이 확실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문화주의적 과학 소설이 어째서인지 유사 인간의 타자성에 대한 넓은 정의나 갑작스레 튀어나온 풍속(계급)소설로서의 과학 소설로 분화되며, 두 번째와 세 번째 유형을 이루고 있던 인지적 지도 그리기과학 밖 소설은 왜인지 새로운 분류에서는 괄호 속으로 몰래 첨가되어 동일하다는 듯이 받아들여진다. 이 과정에서 적어도 세계의 형상에 있어서는 분명히 다른 성질을 띠고 있을 조하형의 조립식 보리수나무과 김희선의 무한의 책세계의 세계 없음에 대한 고작 증상으로 격하된 후 귀하고 드문 노선에 편입된다.

 

어떠한 노선을 설정해보려는 것은 2008년에 썼던 복거일과 듀나에 대한 글을 적어도 그 이후에 대한 추가적인 탐구 없이 10년 전에서부터 그대로 끌어올려 범박하게 민족적 정체성과 젠더 정체성으로 나눠진 틀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이러한 틀에서는 그의 최근 글이 다룬 김초엽, 박문영, 윤이형의 각기 다른 젠더, 인종, 인간과 유사인간의 정체성 형상화들도 아마 유사인간의 타자성을 다룬다는 문화주의적측면에서 단순히 듀나의 노선으로만 불리며 뭉뚱그려질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 각자 다른 성질과 특징을 띠는 SF 작품들을 (특히 (유사)인간의 측면이 텍스트 내적으로 형성되고, 비평적으로도 다뤄져온 김초엽의 작품을) 모조리 그러한 노선을 곧이곧대로 따라가는 작품이라고는 부를 수는 없다. 이 갑작스러운 분류의 혼선은 설명되지 않은 채 마무리되고, 그 급한 종결의 당혹감은 앞서 말한 지점에서도 충분히 느껴지지만, 듀나를 문화주의적 과학 소설의 지점으로 던져 넣는 것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다시금 면세구역에서의 현기증을 메이야수의 시도와 결합하며, 어쩌면 그런 세계의 현기증을 마찬가지로 담아낸 작품들을 함께 다뤄보면 괜찮을 것이다.

 

면세구역에서 태어난’, 다른 세계의 주민이 사용하는 자연스러운단어들이 그 세계에 바깥에서 진입해온 이들에게 현기증만을 안겨준 후, 작품의 막바지에서 서술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어요.내가 말한다. “나를 이해시키려고 하지 말아요. 나는 내가 쓰는 언어 수준에서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하겠어요. 감각을 설명할 수 없는 언어는 소용없는 것이겠죠. 하지만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내 감각이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것 역시 무슨 소용이겠어요?당신은 포기한 듯 웃는다. (...) 이미 이 혼란은 단어의 부조리한 조합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단계까지 올라갔다. 나는 가방 안에 손을 넣어 팝콘(고양이의 이름 - 인용자)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다시 내 감각을 복구한다. 당신은 다시 일상어로 말하지만 나는 당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 나는 당신의 입에서 떨어져 나온 단어들이 진동 폭을 불가능의 영역으로 살짝 당기며 위태롭게 발음되는 것을 들으면서 만족스러워한다. 거기까지가 내 한계이며 형우의 한계다. 우리의 감각은 여전히 지상에 남아 당신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부조리한 자유의 그림자만 맛본다. (면세구역, 20. 강조는 인용자)

 

항구적 법칙 또 법칙의 항구성이 불가능한 비일관성의 세계에 잠재된 형이상학적이고 문학적인 가치를 실현시키고자 시도하는 메이야수의 시도가 매우 매력적인 동시에 결국에는 그만큼 불가능하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변양의 정도가 강해져 비일관성과 유동성이 법칙과 체계를 무화시킬 때, 세계 자체는 그러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어도 결국에 이 세계를 형이상학적이거나 존재론적으로 사유하거나 문학적으로 재현하거나 (서로가 별다르지 않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다시금 법칙과 체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법칙과 체계는 언어의 법칙이며, 물론 수많은 덜컹거리고 튕겨나가는 엇박자와 예외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언어 체계에 내재된 법칙은 임계점으로 추동되는 비일관성과 유동성을 갖고 있지는 않다. 인식과 사유와 재현, 더 나아가 비일관적이거나 유동적일지 모를 상상의 과정 모두 결국에는 이러한 언어적 체계의 법칙을 따라서 진행될 수밖에는 없으며, 당연히 비일관성과 유동성을 최대한 보장하더라도, 그는 원래 세계만큼의 혼돈을 유지할 수는 없다.

 

내게는 서술자의 현기증이 그런 인식할 수도 없고 사유하거나 재현할 수도 없으며 심지어 상상조차 못하는 세계의 끄트머리를 맞닥뜨릴 때 나타나는 것으로 느껴진다. 물론, “면세구역은 바로 이곳 신촌 어딘가에 있고, 내 앞에는 당신이 당신의 부조리한 미소와 함께 앉아있다.(면세구역, 20)” 면세구역은 분명히 법칙의 바깥에 어쩌면 세계의 세계 없음같은 방식으로 존재하는 세계다. 하지만 여전히 세계가 마련한 체계와 법칙 안쪽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면세구역의 주민이 짓는 부조리한 미소는 결국 세계의 끄트머리가 된다. 어떻게든 이를 통해 그 바깥으로 접속해보려는 시도는 인용했듯 단어의 부조리한 조합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단계까지 올라가는 말들이 진동 폭을 불가능의 영역으로 살짝 당기며 위태롭게 발음되는 형상만을 마주하는 것으로도 이어진다. 여기에서 서술자가 인식과 사유, 재현 자체가 지금의 세계와 법칙, 체계 속에서는 불가능한 너머나 배후, 바깥을 끝도 없이 바라는 것은 단순히 욕망을 공회전 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듀나의 인물들은 그런 음모론적인 정치적 무의식을 따라 무용한 추동을 반복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거기까지가 내 한계다라는 사실을 확실히 인지했을 때, 서술자는 언어와 감각 사이에 놓인 불가능함을 받아들이며 나는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어요.”, “나를 이해시키려고 하지 말아요.”라고 답한다. 이 상황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지상에 남은 채 그림자를 맛보, 애초에 그 인식과 사유와 재현 모두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올라올 때까지 올라온 수준에서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어떠한 체념이라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적어도 서술자는 죽은 동생 형우의 단서에서 시작해 면세구역을 찾아 수많은 대도시를 돌아다녔으며, 기어이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의 끄트머리까지를 마주했다. 면세구역의 거주민이 짓는 부조리한 웃음이 그러한 끄트머리로써 불가능함을 지시한 채 존재할 때, 복잡성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에 이해 불가능하고 면세된 구역을 생산하는 세계 속에서 자신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그려보며 기어이 끄트머리까지 다다라서 마침내 알게 된 서술자는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와 법칙 속에서는 자신이 바깥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만족한다. 그것은 만족스럽다. 하지만, 정말로 그게 끝일까?

 

6. 잔혹하지 않은 듀나의 테제

듀나에게 냉담하다거나 쿨하다거나 무심하다거나 시니컬하다거나 매정하다는 수식어를 들어맞지 않음에도 굳이 붙여본다면, 이것은 그의 작품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많은 방식으로 죽어나가기 때문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런 사람이나 죽음 자체가 그가 종종 설정하는 세계에 비해서는 정말 별 거 없고 별 게 아니란 것을, 또 그들이 존재하는 세계가 사실은 순환적인 폐쇄회로의 상이라는 것을, 다양한 세계()의 끄트머리를 제시하며 여기까지가 끝이자 전부라고 못 박는 것으로 보여줘 왔기 때문이다. 훌륭한 근작을 하나만 아쉬움과 함께 짧게 인용하자면, 얼어붙은 삶에서의 영화관을 통한 시간여행과 비슷하게, TV 드라마의 작가가 제작한 뒤 존재하게 된 세계들을 등장배우의 캐릭터를 매개삼아 이동하는 인물들이 앞서 말한 것과 비슷하게 세계의 법칙을 알게 되고, 그 끄트머리들에 닿으며 평행우주를 여행하던 중 하늘에 나타난 특정한 형상이 세계 혹은 신의 개입이기를, 이 지루한 게임을 끝내고 진짜 우주를 보여주겠다는 신호이기를 바랐지만, “하지만 그건 그냥 구름일 뿐이었다고 일갈하는 마지막 문장이야말로 그러한 듀나의 세계들을 가장 적절하게 보여준다.

 

당연하게도 어떤 경우에 이 세계의 끄트머리를 마주하는 인물들은 무력감과 현기증 속에서 절망한다. 그럼에도 어떻게 보자면, 세계가 위상학적으로 정말로 순환적인 폐쇄회로더라도, 아니면 어떻게 해서 그 법칙과 체계의 끄트머리를 마주했더라도, 그 끄트머리의 너머와 바깥이 있더라도 그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더라도,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 그럼 무얼 할지이다. 듀나의 여러 단편들이 탁월해지는 것은 단순히 냉담하다고 불릴 방식으로 세계들의 끄트머리만을 전면전의 책임자인 아버지가 보낸 편지처럼 던져놓고만 가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 세계 속의 인물들은 끊임없이 자신과 함께 세계의 끄트머리에 닿은 다른 이들과 함께 관측한 결과를 나누고, 가설을 세우며 이론을 검증하고, 다시금 자신들의 법칙과 체계를 수정하며, 불가능하더라도 여전히 이 세계를 확실히, 그러므로 그 무엇보다도 과학적으로알아내보기 위해 행동하기 때문이다.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무책임한 통보와 이해 불가한 한계까지 닿은 후의 만족감만이 모든 것이 아니다. 이 점에 있어서 듀나는 사실 그렇게 냉담하지도 매정하지도 않다.

 

면세구역에서도 SF적인 메가텍스트성과 대중문화 애호의 상호텍스트성이 쉬지 않고 가장 많이 등장하는 스핑크스 아래서에서는 동명의 가짜 영화를 장난으로 기입한 온라인 영화 데이터베이스에 시간이 지날수록 수많은 진짜자료와 원본, 심지어 인물과 기록까지 추가된다. ‘클로이 베리라는 가명으로 이 농담을 기입한 올리비아 에번즈와 함께 이 현상의 가설을 세워보는 서술자는 자신의 큰아버지도 자신이 겪는 1946년의 레즈비언 필름 느와르 영화와는 하등 상관없을 금오전이라는 조작된 전기 소설의 복사본에 대해서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는 것을 따라 가짜 영화와 소설들을 조작해내는 전 세계적인 비밀조직의 음모설(면세구역, 40)”이 있는지 까지를 궁리한다. 여기서 서술자는 갑작스럽게 당신이 생각났다며 당신을 호명하고, 작품은 순식간에 당신에게 보내는 그의 메시지로 뒤바뀐다. 서술자에 의하면 당신의 주장은 역사는 각 시간 단위마다 무언가를 생산해야만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만약에 한 특정시기가 그 시기의 가능성을 충분히 활용하지 않았다면 그 시기는 실패한 셈이 된다. 그리고 만약 한 단계가 충분히 성공적이지 않다면 나중에라도 그것을 보충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면세구역, 41)”라고 요약된다. 거대한 역사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후취하게 된 <스핑크스 아래서>금오전의 조작은 이 세계의 뒷면에서 그러한 임무를 수행하며 만들어진 작품들인 셈이다.

 

자유의지의 측면에서 거대한 배후의 조종자가 존재한다는 음모론적인 서사나 그리고 그러한 세계의 끄트머리를 마주하게 된 서술자는 이 모든 배후와 그 배후의 임무에 대해 이렇게 조소한다: “필연적은 아니라고 해도 이런 주장에는 어딘가 종말론의 분위기가 풍긴다. 당신들은 세상이 끝나기 전에 마저 못 한 일을 허겁지겁 마무리 짓는 사람들 같다.(면세구역, 42. 강조는 인용자)” 어쨌든 기본적으로는 씨네필인 서술자도 물론 조작된 영화의 미심쩍은 출연 배우들의 속속들이 나타나는 뉴스를 듣고 잠시 흥분했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면세구역, 42)”어 하지만, 그럼에도 기어이 닿게 된 세계의 뒷면과 그 끄트머리의 단면을 마주한 채 그는 당신’()에게 따져본다: “그런데 당신들이 올리비아 에번즈에게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물어봐도 될까? 왜 최근에 나온 해리엇 홀바인(<스핑크스 아래서>출연 배우’ - 인용자) 전기의 공저자 중 한 명이 클로이 베리인지?(면세구역, 42)” 이 마지막 문장은 물론 일차적으로는 당신들의 임무가 뻗친 마수를 드러내는 반전으로 기능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질문은 세계의 끄트머리를 따라가다 이 경우에는 특히나 종말론적인 음모론으로 가득 찬 대중문화의 배후조종자들을 만난 서술자가 그곳에서 경로를 끝내지 않고 그러한 세계의 배후랍시며 설치고 다니는 것들에게 끈질기게 따지고 되물어보는 것으로 느껴진다. 이러한 따져 묻고 또 되묻는 것은, 의 남자와 얼어붙은 삶의 혜나로 돌아가는 먼 길을 마련해준다.

 

각각 얼어붙은 삶의 마지막 문장인 우주가 거기에 신경이라도 써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알아서들 생각하기 바란다.”가 어디까지나 혜나와 남자가 아니라 서술자가 적어도 텍스트 안에서 내리는 최후의 결론이라는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두 작품의 서술자는 세계의 끄트머리를 마주한 다음 거의 우주적인 체념에 가까운 태도로 (또 서술자인 만큼) 작품을 불시에 끝나지만, 그럼에도 이 대결론 이전에는 혜나와 남자가 말하는 그들의 방식이 나타난다. 우선 순환적인 동시에 비선형적으로 돌고 돌며 좁아지는 캔버스 같은 역사 속의 존재로써,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 인간의 역사가 그렇지 않거든요. 그러니 점점 역할이 축소되고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됩니다. 그 제한된 범위 안에서 남은 일을 하려면 앞에서보다 더 많은 지혜와 지식이 필요합니다. 잘못하다가는 전에 한 일을 망쳐버릴 수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마무리가 중요한 법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해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각 시간대에 있는 여러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글로 써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태평양 횡단 특급, 219~20. 강조는 인용자.)

 

고매한 의무감이라고 비꼬다가 그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태평양 횡단 특급, 220)”는 결론을 내리는 서술자가 정말로 남자(혹은 언젠가 도래할 자신’)의 할 일에 마냥 냉소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특정 순간에 남아있는 적은 양의 자유 의지와 좁은 캔버스의 여백들만을 가지고 자신()의 그림을 최대한 조심스럽고 천천히 마무리해보려는 남자는 적어도 세계의 종말을 딸에게 통보하는 아버지보다는 고매하더라도 자신만의 의무를 설정하고 세계의 끄트머리에 닿은 자로써의 책임을 다한다. 텍스트 안팎을 흐려놓고 보자면 그러한 남자의 부탁을 정말로 SF 소설의 형태로 발표한 이라는 작품 또한 마찬가지로 서술자에게 이어진 부탁을 실행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정해져 있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저에게는 아직 살지 않은, 그러니까 정해지지 않은 미래가 있습니다(태평양 횡단 특급, 218)”고 말하는 남자는 아직까지는 칠하지 않은 캔버스에 최대한 집중하기로 하며, “환생한 다른 들이 읽고 미래를 보다 알차게 꾸며가게(태평양 횡단 특급, 220. 강조는 인용자)”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또 다른 그()은 그 이야기를 쓰며, 다시 그 이야기를 읽고 이를 순환하는 작업이 일어난다. (당연하게도 이것은 단지 문학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면 문학이 해야만 하는 일도 아니다.) 캔버스의 넓이나 주어진 여백의 크기가 자유의지의 한계가 될 때, 의 세계에서 을 인식한 모든 존재들은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제한을 최고치로 활용해보려 한다. 한편 역류까지도 포함시켜 고정된 채 흐르는 폐쇄회로 같은 세계의 끄트머리에까지 닿은 존재로써, 혜나는 이렇게 말한다:

 

이미 내 갈 길은 정해졌어. 지난 몇 년 동안 난 미래의 내가 남긴 수많은 흔적들과 마주쳤어. 난 적어도 내가 앞으로 20여 년 동안 무슨 일을 할지 알고 있어. 그 뒤의 일도 어느 정도 감은 잡고 있고. 심지어 난 내가 어떻게 죽을지 알아. 기억해? 몇 년 전에 우리 학과 방에서 불타죽은 여자 말이야. (...) 아마 20년 뒤에는 알게 되겠지. 그 때까지는 어떻게든 이 감옥과 싸워볼 생각이야. 내 저항이 이미 처음부터 끝까지 사전에 결정된 역사의 일부일 건 알고 있지만, 그게 뭐 어때서? 적어도 그 미리 쓰인 역사는 결코 지루한 이야기는 아닐 거야.” (태평양 횡단 특급, 233~4. 강조는 인용자.)

 

몇 십 년이나 되는 (혹은 그밖에 되지 않는) 시간 여행을 통해 세계의 끄트머리는 물론 자기 자신의 끝까지 알게 된 혜나는 그가 존재하는 세계의 고정된 인과율과 이 세계의 추가된 존재로써의 자신, 또 그 이후 서술자가 맞닥치는 우주가 거기에 신경이라도 써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도 불구하고, 싸워보고 저항하겠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 싸워보고 저항해보는 단순히 불가능함에 대한 만족이 최선일 세계의 끄트머리 너머를 뚫어보겠다거나 음모론과 정치적 무의식에 푹 잠긴 배후의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말했듯, 혜나는 이 모든 것들을 이미 다 알고 있다. 그가 이 거대하고 고정된, 폐쇄되고 순환하는 세계와 기꺼이 싸워보려는 것은 적어도 그 미리 쓰인 역사는 결코 지루한 이야기는 아닐 거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이야기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서의 이야기 또한 앞서 말했듯 단순히 문학이 하는 일, ‘문학이 해야 할 일도 아니다.

 

이야기는 지금까지 세계의 끄트머리를 향해가고 그 세계의 끄트머리를 돌아보며 이 모든 형상을 기록하고 지도를 그리는 행위의 경로다. 적어도 혜나는 자신이 그렇게 세계와 어긋난 채 다른 존재들보다는 확실히 기이하거나 변칙적으로 그리게 될 경로가 미리 그려졌든 그렇지 않든 간에 결코 지루한 이야기는 아닐 거라 믿는다. 그러므로 우주가 거기에 신경이라도 써야 할 이유가 없어도, 끄트머리를 탐구하는 경로에 대한 지도학적인 믿음은 세계의 끄트머리를 마주하면서도 기어이 쟁취해보고 따라가 볼만한 지침이 된다. 물론 그 믿음은 멸망할 세계에 유일하게 남은 최후의 희망 따위도 아니다. 복도훈과 다르게, 듀나의 인물들은 이제 뭐 하고 놀까?” 물으며 모든 것을 끝내진 않는다. 그 질문은 차라리 본격적으로 세계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고, 경로를 만들어보려는, 그 이후 나타날 수많은 질문들의 시작을 알리는 것일 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세상은 그럼에도 여전히 계속된다.

 

7. 끄트머리의 카토그래피로 이 세계에서의 좌표 값을 찍어보며

물론 단순히 듀나의 거대한 작품 목록 중 대여섯 편의 오래된 단편들을 다뤘다고 해서 그것이 듀나의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이것이 적어도 그 세계로 접속하는 하나의 입구이자 통로라고 생각한다. 듀나의 어떤 세계는 층층이 쌓인 메가텍스트와 상호텍스트와 텍스트를 부단히 오가며 자기지시적으로 형성되었으며, 그와 함께 가끔씩은 순환적이고 폐쇄적인 위상으로 존재한다. 그러한 세계의 뒷면을 타고 기어이 올라가 배후에 있다는 끄트머리를 마주하는 사람 중 누군가는 책임을 방기하고, 다른 누군가는 책임을 집어 들며, 또 누군가는 한계 앞에서 만족하는 것으로 끝내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경로를 만들어 계속 세계에 대한 탐구를 이어가며 새로운 끄트머리들을 찾아다닌다. 듀나의 인물들은 물론 그런 세계만큼이나 다양한 태도의 영역 안에서 끊임없이 세계의 형상과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토론을 계속한다. 당연하겠지만 여기서 확답은 제시되지 않는다. 듀나가 제시하는 세계상이나 존재 방식은 단순히 픽션적이며 그렇기에 꽤 즐거운 가능태로써 기능할 뿐이고, 이 가능한 방식을 정말로 장착해본 후 세계에 접속해보는 것은 듀나를 읽은 이후의 일이며, 이 글은 거기까지는 닿을 수는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떤 순환성도 폐쇄성도 끄트머리도 없는 법칙으로 구동되고, 바로 그 무한하게 가능한 법칙자체가 세계의 끄트머리가 되어버린 세계, 메이야수에겐 천국과도 같을 미치광이 하늘이 그러한 토론의 장이 된다. 이 토론장을 이야기하며 긴 여로의 끝을 내볼 수 있을 것 같다. 작품의 깔끔한 삼부작 구성에서 일단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자신의 정신 나간 마음을 물리적 대상에 투영할 줄 알게 된, “한마디로 거의 전능했던(태평양 횡단 특급, 256)” 루시 헌트의 능력이 만들어놓은 왜곡된 물리 법칙과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 “논리와 물리 법칙이 통용되지 않은 이상한 나라(태평양 횡단 특급, 258)”를 향해 곧장 세 번째 장으로 가볼 수 있다.

 

헌트가 마침내 그의 능력을 발현시키는 첫 부분과 세계의 변양이 완벽히 퍼지기 전에 이를 막아보려는 두 박사의 노력이 실패하는 두 번째 부분이 숨 가쁘게 지나간 후에 찾아온 신세계의 저녁 식사 시간에 차분한 토론이 벌여진다. 어떻게 보자면 헌트의 신세계는 뒤죽박죽인 변양이 너무 많이 일어나, 과학의 가능 조건과 의식의 가능 조건이 모두 사라진 세계이긴 하지만, 재미있는 점은 여전히 신세계의 주민들은 그 모든 변양과 근거 없음, 비일관성과 유동성까지를 바탕으로 자신들만의 체계를 만들어보려 노력한다는 점이다. 이 세계는 말하자면 너무나도 많은 세계들이 겹쳐 있기 때문에 일관된 하나의 풍경을 1초 이상 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답니다. 요새는 사람들이 그 도시에 들어서자마자 수천 개의 인격으로 분열되어 각각의 과거로 쓸려 들어간다고 합니다.(태평양 횡단 특급, 275)”는 말로 설명되는 세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를 그리기 위해 스케치 여행 중(태평양 횡단 특급, 275)”이던 서술자는 작은 건물에서 하룻밤 묵어가고, 그 속의 다양한 존재들과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이 세계에는 우선, 기어이 물리학을 해보겠다는 로봇이 있다:

 

다들 물리학자는 죽은 직업이라고 하지요. 더 이상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질서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전 다시 시작하기로 했답니다. (...) 언제나 일어나는 일은 똑같아. 중요한 것은 물리 법칙과 인식의 상호작용을 이해하고 그것들을 정량화 하는 거야. (...) 네가 뭐라고 하건 신세계는 모든 걸 허용하는 혼돈이 아니야. 분명히 밑에 어떤 질서가 존재해.” (태평양 횡단 특급, 276~7. 강조는 인용자)

 

신세계가 막 열렸을 때 풀랭은 만물의 모든 것들을 설명하는 법칙들을 찾아냈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사실은 뭐였지? 신세계가 녀석의 이론에 맞추어 물리 법칙을 고친 거였잖아.” (...) “아마 계속 밑을 파면 우린 그 법칙과 마주칠 거야. 그 법칙을 이해하면 우리 세계를 지배하는 보다 기본적인 법칙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신세계가 등장하면서 과학이 끝났다고 한탄할 이유는 아직 없어.” (태평양 횡단 특급, 277. 강조는 인용자)

 

한편 물리학이 아닌 미학의 방식으로 여전히 신세계의 법칙 아닌 법칙 아래에서도 새로운 것이 나타지 못했다며 그 새로움의 가능성을 탐구하거나 실천해보려는 이도 있다:

 

모든 이야기들은 진실입니다. 하지만 우린 그들과 별도로 진짜 역사가 존재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 아무리 수천의 역사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해도 우린 모두 단선의 역사를 가진 구세계의 후손들입니다. 그건 구세계의 역사가 특별히 더 분명한 실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세계를 능가하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이죠. 우린 구세계가 남긴 재료들을 이리저리 변형시키기만 했지 전적으로 새로운 어떤 것을 창조하지는 못했습니다. 우린 구세계의 역사와 신세계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역사들을 물리학적으로 구분할 수 없지만 미학적으로는 구분할 수 있습니다.” (태평양 횡단 특급, 278~9. 강조는 인용자)

 

구세계에서 신세계로의 가능성이 분출된 비약적인 전복이 남긴 유산에 대한 의견과 더불어, 다시금 새로운 뛰어넘기를 기약하는 바람이 여기에 추가된다:

 

이상한 일도 아니야. 구세계는 가능한 수많은 우주 중 하나의 형상만 고정된 세계였어. 미치광이 여왕은 구세계를 파괴한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의 존재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 불과하지. 그렇다면 구세계 때 우리가 알고 있었던 우주의 형상이 꼭 우리와 무관한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어떤 것이야 할 이유도 없어. 난 구세계가 일시적인 현상이었다고 생각해. 아마 고도로 인공적인 세계였을지도 몰라. 수많은 창조 신화들을 봐. 창조자들은 무에서 무언가를 창조하는 대신 혼돈에서 질서를 끄집어내지. (...) 모든 게 구세계에서 나왔어. 구세계만 없었다면 아직까지도 우린 모양도 없는 꿈을 꾸면서 혼돈 속을 떠돌아다녔겠지. 아마 우리가 그런 구세계의 질서에서 해방된 진짜 이유도 이제 다음 단계로 뛰어넘을 때가 되었기 때문일 거야.” (태평양 횡단 특급, 282. 강조는 인용자)

 

안정되어가고 있는 신세계가 어쩌면 그 때까지의 법칙과 인식 바깥이라고 여겨졌던 끄트머리 너머의 세계까지도 모조리 포함해서 그 범위를 무한정으로 느껴질 정도로 확장시켰을 때, 여전히 그렇게 공존하는 무한한 가능성과 무한한 불가능성까지도 이 세계의 존재들에게 있어선 한계가 된다. 여전히, 이들은 체계와 법칙을 설정해보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인식하고 사유하며 갱신하는 세계의 끄트머리에 닿는다. 신세계의 다음 단계를 모색하는 토론이 네 가지 버전이 존재하는 영화에서 범인이 아닌 진짜 버전을 찾는 영화 시청 시간으로 이어지고, 서술자는 독일의 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형상으로 식사와 토론에 참여한 존재가 사실은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동시에 불가능케 한, 한동안 또 오랫동안 서술자와 함께 했던 루시 헌트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마지막 부분의 대화에서 여왕은 이렇게 신세계 이후의 삶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며 서술자와 대화를 나눈다:

 

“(...) 우리가 여기서 진짜로 하려는 것은 우리가 멋대로 조종하거나 파괴할 수 없는 불변의 법칙을 발굴하고 그 기반 위에 새로운 세계를 세우는 것입니다. 언젠가 저 미친 로봇은 성공할 거예요. 우리에겐 영겁의 시간이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우린 상대적인 의미에서 이 지겨운 권능을 박탈당하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모든 것들은 다시 지겨운 일상으로 돌아가겠지요.” 내가 말했다. (태평양 횡단 특급, 285. 강조는 인용자)

 

작품 내내 언급되는 장면인, 카툰 <루니 툰즈>에 등장하는 코요테의 추락은 세 번째 장의 제목이기도 하다. ‘코요테의 추락녀석이 바닥이 있어야 할 자리를 더듬게 되고 자신이 허공 중에 떠 있다는 걸 알게 돼자신이 추락해야 할 운명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바로 그 순간 녀석의 몸은 직선으로 떨어지고 말(태평양 횡단 특급, 276)”아 버리는, 달라진 세계만의 고유한 법칙을 비유한다. 신세계의 경우 이러한 코요테의 추락은 그럼에도 마를레네 디트리히가 된 루시 헌트 일당이 물리학적인 동시에 미학적인 측면에서 절대적으로 성립하는 법칙을 발굴해내기 위한 단서로 기능한다. 그럼에도 루시 헌트와 짧게라도 경이와 흥분을 경험한 서술자는 신세계의 다음 단계로 진입하는 것이 아니라 신세계를 구세계처럼 법칙이 기능하는 세계로 만들어보려 할 때에, 다시금 구세계의 권태가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떻게 보자면 픽션적인 특성에 따라 그 한계와 범위, 모든 끄트머리가 최대한 무화된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미치광이 세상의 존재들은 그들의 경로를 법칙과 체계의 권태를 향해 돌리고, 그 세계를 가능케 한 본인이 무한히 열린 세계의 문을 서서히 닫아보려 한다.

 

앞선 단편들의 인물과 엮어, 헌트가 고백하는 계획을 마찬가지로 듀나의 인물들이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방식의 일종으로 뒀을 때, 적어도 헌트는 최고치로 열린 가능성 안에서도 더 이상 만족하기 불가능한 상태이기 때문에 체념했다고 둘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면세구역에서 현기증을 느꼈을 때 이해하지 못하는 한도까지 접근한 점에 만족하고 그 다음이나 이후를 체념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헌트는 이 무한한 가능성이 열린 신세계에서 넘쳐나는 전능을 갖고 있더라도 이를 느끼진 못한다. “더 이상 그녀에게 부여된 전능함에 흥분하던 열다섯 살 소녀가 아니게 되고 지금 그녀의 눈에 남아 있는 건 권태와 실망(태평양 횡단 특급, 284. 강조는 인용자)”이라는 서술자의 말이 헌트가 지금 처한 상태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헌트는 자신에게 주어진 전능함에 흥분했던 것이지, 결국 완벽하고 무한한 전능감을 느끼지는 못했다. 전능감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권태와 실망, 어쩌면 무력감과 현기증은 자연스럽게 헌트가 세계를 인식하고 사유하며 재편하는 방식과 태도 자체가 한계, 끄트머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헌트의 다음 경로, 이어지는 무한하게 가능한 이야기는 신세계의 다음 단계로 진입하기 위해 희망을 예비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그 신세계가 구세계와 비슷한 틀로 돌아가게 하려 애를 쓰는 것이다. 이것을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마저도 어쩔 수 없이 한계를 만들 수밖에 없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전능함을 갖고 있음에도 전능감을 갖지 못하는, 다르게 말하자면 전능을 소유하지만 전능을 실감하지는 못하는 헌트와 불능함에 처했음에도 불능감을 갖진 못하거나 거부하는, 그러니까 불능의 상태에 묶여있지만 불능을 실감하지는 않는 혜나는 상당히 대조적으로 느껴진다. 헌트의 경우 한계는 세계나 법칙이 아닌 자기 스스로에게서 찾아온다. 그러므로 그는 신세계의 문을 열어 거대한 혼돈의 가능성을 만들었음에도 다음 단계로 진입해 한계 범위를 갱신해 지도를 그릴 새로운 세계를 생산하는 것을 포기하고, 권태적인 구세계 속에서 만족해보려고 하며 물론 그 또한 실패할 것이다. 반면 혜나의 경우, 한계는 세계와 법칙 자체로 마련된 채 단단히 고정됐다. 그럼에도 혜나는 그 앞에 주어진 경로가 이미 짜놓은 이야기의 재미를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혜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세계의 끄트머리들을 방문하고, 지도를 만들어나갈 수 있으며, 주어진 세계와 법칙 속에서도 만족을 어떻게든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헌트의 낙관적인 비관과 혜나의 비관적인 낙관을 최대치로 극단화시킨 것일 뿐이다. 이렇게 해석해본 둘의 세계상과 존재 방식을 양쪽에 놓고 평면을 만들었을 때, 지금까지 다뤄온 작품들에 나타난 사항들은 이 스펙트럼 속에 위치될 수 있을 것이다. 듀나의 인물과 세계에 알맞은 체계나 법칙을 이렇게나마 설정할 수 있다면, 이들은 모두 스펙트럼 위에서 자신이 존재하게 된 세계의 위치 값을 찾아낸 후, 지도를 그려나가며 끄트머리를 마주한다. 세계의 상이 어느 정도 확립된 이후, 다음 값을 찾아내 마침내 좌표를 찍는 것은, 그 때부턴 세계가 아니라 그 세계 안에서 존재하는 스스로의 몫이 된다.

 

나는 이것이 듀나의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이고, 그 인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방식들은 픽션 세계가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도 적용해볼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듀나의 세계를 접하는 행위는 말하자면 위상학적이고 존재론적으로 주어진 세계를 관측하고 지도 그리는 방식을 알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관측과 작성은 물론, 읽는 이의 몫이다. 누군가는 섣부르게 자신의 세계가 종말을 맞았다 추정하며 무책임하게 체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던, 바깥이 정말 있건 없건 간에, 적어도 이 세상은 그럼에도 여전히 계속된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값을 어느 평면에 어떻게 두는 지다.

 

나원영(철학 15)
나원영(철학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