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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無知) 너머의 우리를 상상할 수 있다면: 박민정 세실, 주희그리고 최은영 씬짜오, 씬짜오

유승희(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수료)

 

 

내가 에게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아내지 않고서는,너를 알려면 나의 언어가 부서지고 굴복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다른 언어로 바꿔 말하는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내가 우리를 소환할 수 있는 길은 없다.너는 이 방향감각의 혼란과 상실을 통해서 내가 얻게 되는 결과이다.이것이 바로 인간이 존재하게 되는 방식이다.다시 또다시, 여전히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으로서.

- 주디스 버틀러, 폭력 애도 정치

 

1. 서로를 알지 못하는 , 무수한 결을 가로질러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동일성을 획득할 수 없는 얼굴들과의 만남이다. 타자는 얼굴과 얼굴의 마주침을 통해 에게 현현한다. 얼굴은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로 다만 그곳에 있다. 그러나 자명한 것으로 여겨졌던 자아는 타자에 의해 심문의 대상이 된다. 예기치 못하게 맞닥뜨린 얼굴, 그 타자성에 의해 는 외부로부터 응답을 요청받는 자리에 놓인다. 물론 응답은 의무가 아니며 는 타자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의 주체성은 구체적인 얼굴에 대한 응답, 그 관계 맺음을 통해서만 형성되고 담보될 수 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의 핵심은 타자를 자아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동일성에의 욕망에 저항하는 것 그리고 어떠한 보답도 바라지 않으면서 절대적 타자와 연루되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타자의 낯섦을 절멸시키지 않고 보존하는 것은 가능할 수 있을까?

레비나스를 평생토록 윤리적인 것에 천착하게 만든 그 질문을 지금 여기에서 다시 던지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페미니즘 리부트2016촛불을 통과하면서 한국사회에는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열망이 가시화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배제를 기반으로 하는 기존의 집단주의적인 공동체에 발딛고 있는 것이기도 해서, 소설가 황정은이 적실하게 지적했듯 우리가 무조건 하나라는 거대하고도 괴로운 착각아래 모두가 좋은 얼굴로 한가지 목적을 달성하려고 나온 자리에서 분란을 만드는 일을 거리끼는 마음을 낳기도 했다. 이는 지금까지 공동체의 원리라고 믿어왔던 동일성을 심문해야 한다는 요청으로 이어졌다. 평평하다고 믿어왔던 세계 그래서 우리가 무조건 하나라는 착각이 가능한 세계가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마주할 때, ‘와 타자-세계의 관계는 새롭게 정립된다. 그것은 예기치 않게 마주친 타인과의 만남으로 인해 발생하는, 알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동일성을 공유한다는 암묵적인 믿음 아래 형성된 선험적인 우리내부의 삭제된 차이를 바라보게 만든다. 비록 그것이 전적으로 의 시선이라는 어찌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닌 것일지라도.

일생동안 는 수많은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 타인과의 만남이 일국적인 차원이 아니게 된 지도 오래다. ‘는 언제 어디서나 이방인을 본다. 한국의 관광지에서, 대학에서, 일터에서, 거리에서, 그리고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그들을 본다. 이는 역시 언제나 이방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경계가 흐려진 (것처럼 보이는) 시대, 그러나 전염병으로 인해 국경이 다시 세워지고 있는 이때에 가 만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국경 너머에 존재하는 다양한 조건들은 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그러니 다시 한 번 묻자. 서로를 알지 못하는 가 무수한 결을 가로질러 만난다는 것, 여기에서 서로가 이미마주쳤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리 노력한들 이방인인 사이의 차이는 쉽게 지워질 수 없는 까닭에, “우리가 무조건 하나라는 착각은 에게 가닿을 수조차 없다. 그렇다면 이전의 질문들을 이어받아 반복해서 묻자. 국경을 넘는 타자-이방인으로서의 를 바라보는 는 과연 에게 타자-이방인이 아닐 수 있는가. 서로의 낯섦을 껴안은 채로 우리를 형성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하자면, ‘“‘개체의 차이들을 포함하는 집합적 주체로서의 우리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인가. 만일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가.

이 시점에서 여성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국가를 초월하며 맺는/미끄러지는 관계를 염두에 두곤 하는 박민정과 최은영을 떠올려본다. 박민정의 세실, 주희와 최은영의 씬짜오, 씬짜오는 각각 지금-여기의 한국()-일본(), 그리고 한국()-베트남() 사이의 관계를 파고드는 작품이다. 그들의 신체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민족적 정체성이 흔적처럼 새겨져 있다. 두 작품은 국가의 책임이 명확히 존재하는 전쟁이라는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기억/망각할 때, 개인인 의 관계가 어떻게 흔들리는가를 추적한다. 그 결과 서로의 무수한 차이-조건을 문제삼지 않는 절대적 환대란 불가능하며, 그것을 유지한 채 우리로 거듭나는 과정에는 수많은 고민과 갈등, 폭력이 필연적으로 수반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폭로된다. 그러나 동시에 두 작품에는 와는 다른 환경을 살아온 를 알지 못한다는 것, 그 무지함에 대한 인정이 역설적으로 우리를 가능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가능성, 그렇게 절대적 환대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공존하고 있다. 그들이 맞닥뜨린 곤경과 가능성을 좇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2. 당연해서 말하지 않는 조건과 그로 인해 실패하는 우리

세실, 주희는 주희의 회상으로부터 시작된다. 오래 전 친구 J를 따라 미국을 여행한 적이 있는 주희는, 뉴올리언스 펍의 뒷골목에서 남자들에게는 최고의 축제이자 자유와 해방의 축제”(17)로 여겨지는 마르디 그라의 한복판에 멍청한 얼굴”(23)을 한 채 홀로 서있었던 자신을 아프게 곱씹는다. 남자들이 여자의 목에 비즈 목걸이를 걸며 네 벗은 가슴을 보여달라고외치면서 동영상을 찍는 곳. 그곳에 영문도 모른 채 서있었던 자신을 떠올리게 만든 것은 한 친구의 문자였다. “여기에서 널 봤어”. 포르노 사이트에서 주희는 “nice Asian slut 43%”(12)으로 수치화되어있다.

그러나 곧 작품의 시간은 지금-여기의 일상으로 복귀한다. 어느새 작품을 가득 채우는 것은 명동의 로드샵 쥬쥬하우스에서 함께 일하는 일본인 세실과의 관계가 자아내는 모종의 긴장이다. ‘코리안 뷰티의 상징인 명동에서 근무하는 주희는 외국인들이 상상하는 한국의 이미지가 무엇인지 체감한다. 하지만 동시에 주희에게 있어 고작 좋아하는 연예인 하나 때문에 타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살아가는세실의 인생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삶”(15)에 다름 아니다. 주희는 한국 드라마와 K-pop”(13)의 세례를 받으며 성장한 95년생 일본인 여성이라는 세실의 위치를 보지 못한다. 그렇기에 주희는 자신이 형성되어온 조건 역시 볼 수 없다. 기업가적 주체로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93년생 한국인 여성 주희에게 외국은 여행 혹은 워킹홀리데이나 청년 레지던시 프로그램”(15)을 통해 경험을 쌓아야 하는 기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주희는 세실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럴 마음조차 없다.

그런 주희가 일터 바깥에서 세실과 지속적인 만남을 갖게 된 것은, 일요일마다 한국어 과외를 해달라는 그녀의 부탁 때문이었다. 세실의 요청이 없었다면 그녀들은 직장 동료라는 피상적인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세실과 주희는 사적인 시간을 공유하게 되지만, ‘성형을 했냐고 묻는 세실에 의해 과외 첫날부터 다투게 된다.

 

주희씨도 성형을 좀 했겠죠? 한국 여자분들은 성형을 많이 하니까요. 보편적으로.”

주희는 그녀가 보편적으로라는 단어를 안다는 사실과, 그렇게 무례한 말을 웃는 얼굴로 한다는 사실에 모두 놀랐다. 주희는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세실 상, 그런 말은 하는 거 아니에요. 일본에선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요?”

왜요? 미인이라서 그런 건데요. 또 한국 여자는 성형을 많이 하기도 하고요.”

한국 여자가 성형을 많이 한다고요? 그러면 일본 여자 대부분은 AV를 찍나요?”

세실의 얼굴이 굳어졌다. 주희는 자기 말에 놀랐지만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런 말이나 다름없는 거예요. 알겠어요?” (20)

 

세실이 주희에게 무례한 말을 웃는 얼굴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주희의 사적인 역사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주희는 세실에게 일본 여자 대부분은 AV를 찍나요?”라고 대답하며 스스로의 발화에 놀란다’. 나아가 주희는 자신의 말이 세실에게 폭력적일 수 있음을 알면서 혹은 모른 척하며 말을 이어가는데, 사실 주희의 반응은 그녀의 신체에 흔적으로 남아있는 뉴올리언스의 경험에 의한 것이다. ‘한국 여자에 대한 말은 주희가 뉴올리언스에서 이미들었던 말이기도 하거니와, 자신의 몸이 단순히 ‘nice Asian’으로 포르노 사이트에 박제되어있다는 사실을 연쇄적으로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포르노에 의한 고통을 알고 있는 주희가 세실에게 건넨 말은 스스로에게도 폭력으로 작동한다. 그것은 자신이 뉴올리언스의 기억으로부터 (아직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뼈아픈 인정이면서, 문득 그 기억을 털어놓고 싶을 때조차 세실에게 포르노 비슷한 어떤 단어도 운운할 수 없”(21)게 만든 견고한 울타리로 작동한다.

위의 대화를 통해 주희는 개인의 삶을 가로지르는 조건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주희는 여전히 세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주희는 세실의 삶이 구성되는데 영향을 끼친 일본이라는 국가, 그리고 자신이 벗어던질 수 없는 한국이라는 국가를 본다. 비록 그것이 서구의 시선에 의하면 동양인Asian’ 이라는 동일한 범주에 속한 것일지라도, 주희는 한국과 일본이라는 국가를 각각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 계기가 모두 여성이기에 맞닥뜨리는 불합리한 추문이라는 사실은 별도의 주목을 요한다. 이는 국가적 정체성과 결부된 여성이 상상되는 방식에 대한 날카로운 고발이기 때문이다. ‘성형을 많이 하는한국여성과 ‘AV를 찍는일본여성이라는 사회적 낙인을 서로에게 가하는 두 여성의 대화는 기묘하다. 여성이 외모 혹은 섹스로만 상상되는 세간의 시선을 폭로하면서도, 기존의 폭력적인 인식체계 속에서는 차이를 지닌 여성들의 연대가 쉬이 달성될 수 없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녀들의 관계는 일상 속의 작은 사건으로도 흔들리고 지연된다.

동시에 위의 대화는 작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다시는 주희씨를 화나게 하는 말을 하지 않을게요”(20~21)라는 세실의 말에 의해 가능해진다. 둘 사이의 과외를 지속하게 한 그 말은, 다음날 세실이 주희에게 건넨 일본 가네보사의 폼 클렌저, 주희가 답례로 건넨 파우치에 있던 새 립스틱이라는 화장품으로 전달된다. 하지만 박민정은 주희의 무지를 깨닫게 만드는데 그 폼클렌징을 역설적으로 활용한다. 얼마 뒤 인터넷에 보도된 가네보사의 리콜 사태”(21)를 통해 주희는 일본의 전범기업에 대해 알게 되고, “나는 왜 한 번도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았을까”(22) 반문한다. 이처럼 화해의 제스처였던 폼클렌징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주희에게 한국과 일본이 거쳐온 식민관계를 마주보게 만든다. 그것은 스스로가 몰랐던 것에 대한 자각에 기반한다.

뿐만 아니다. 주희에게 모국어 사용자로서 자신이 가진 권력”(25)을 깨닫게 만든, 한국어로 나와 우리 가족에 대해 쓰는 작문 과제에 의해 탄로난 서로의 무지로 인해 세실과의 관계는 다시 한 번 미끄러진다. 세실이 써온 것은 순결한 처녀로 구성된 히메유리 학도대로 활동했던 자신의 증조외할머니인 사쿠라코 할머니가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되어있다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세실이 전쟁 영웅의 후손”(31)이라는 사실은 주희에게 얼마 전에 읽은 가네보 리콜 사태 기사를 떠올리게 만들고, “자기도 모르게 빨간 펜으로 야스쿠니 신사라는 단어에 밑줄”(27)을 치도록 추동한다.

작문에 나오는 내용 중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던 주희는 이내 둘을 여성으로 묶어주는 쥬쥬하우스에 입고된 신상품 이야기, 요즘 유행하는 메이크업 튜토리얼 이야기”(28)로 화제를 돌리지만, 귀가 후 히메유리의 탑히메유리 학도대를 검색하고 관련된 영화를 시청한다. “중간에 뜬금없이 하얀 백합꽃”(29)이 나오곤 하는 그 영화에서 주희는 세실의 증조외할머니가 죽지 말고 살아남자고 말하는 사람을 비겁자라고 꾸짖으며 학생들을 독려해 자살하는 선생”(31)이리라 추측한다. 여기에 쥬쥬하우스 본사에서 특정 상품의 수익금 전부를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를 후원하는 기금으로 전달한다는 이야기가 교차되면서 주희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세실이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된 전쟁 영웅4대손이라는 사실이 암시하는 것처럼 그것은 이미 여러 세대를 통과한 것이지만, “매주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를 위한 집회”(32)가 열리고 있는 것처럼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지금-여기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대해 이제 주희는 결코 무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팬케이크를 먹기 위해 명동에서 만난 세실과 주희가 진실한 화해와 치유의 길을 추구하는 집회의 행렬”(35)에 우연히 동참하게 되면서 절정으로 나아간다. 문학평론가 이은지가 최근 발표된 한국소설을 통틀어 가장 기괴하고 섬뜩한 장면이라고 표현하기도 한, 주희의 팔짱을 끼고 위안부 집회에 그 의미를 모르는 채로 흔쾌히 섞여드는 세실의 모습은 한국인과 일본인이라는 정체성, 그리고 세실의 무지가 극적으로 폭로되는 순간을 묘사한다.

3세계 페미니즘 연구자 오카 마리의 말을 빌린다면, “발화자의 위치란 어떤 일에 대해 말함으로써 그 결과로 의도치 않게 놓이게 된 위치.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거기서 무엇을 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므로, “망각을 가능하게 하는 역사적 사회적 물질적 여러 조건을 명확하게 밝히고 그것을 해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말해야만 한다. 오카 마리의 호소처럼 혹은 가 망각하고 있는,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망각하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말해야만 한다.

그러나 주희는 말하지 않는다’. 세실을 통해 자신의 무지와 위치성을 자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아가 J와의 관계를 끊임없이 반추하고 비교하면서도 주희는 소녀상의 의미에 대해 침묵한다. 뉴올리언스의 축제와 비극에 대해 알지 못하기에 차라리 입다물고 앉아 있는 게 편했”(17)던 주희는, 역전된 상황 앞에서 세실의 증조외할머니와 한국의 피해자 할머니가 다르다는 것을 모르는 세실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못한다. 다만 이것은 평화로운 집회”, 그리고 전쟁 피해자를 위한 집회”(36)라고 말할 뿐이다. 그래서 세실은 소녀상을 앞에 두고 한국인들 사이에서 동상의 의미”(37)를 모른 채 남는다. 그렇게 세실의 눈빛은 주희의 시선과 만나지 못한다. 그들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묶이지 못한다.

그것이 마르디 그라, 즉 참회의 화요일에 아무 것도 모른 채 홀로 미국의 밤거리에 남아있던 주희와 겹쳐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주희는 끝내 세실에게, “너무 당연하잖아요? 당신 외증조모는 살아남았다는 게”(34)라는 말을 건네지 못한다. 그 질문이 발화될 때, 사쿠라코 할머니가 미혼녀로 자결하지 않고 생존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세실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희는 세실에게 그 말을 삼킨다. 그것은 어쩌면 J가 그녀에게 마르디 그라의 의미를 알려주지 않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가 알고 있는 것을 역시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는 믿음은 개인이 형성되어온 서로 다른 조건을 폭력적으로 무화시킨다. 모든 것이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납작한 세계에서 발화의 필요성은 사라지고 만다.

그런 점에서 국가/언어/세대/젠더 등의 담론을 교차시킴으로써, 지울 수 없는 차이를 지닌 타자-이방인에 대한 태도를 문제 삼고 있는 세실, 주희는 서로 다른 환경 속에 살아온 개인들이 개별적인 조건을 유지한 채 우리로 거듭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지난한 과정과 그 실패를 그려낸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를 주희의 관점에서만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주희는 타자-세실-를 상상하는 주체인 동시에 타자-nice Asian-로 상상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놓인 자리, 각자의 위치성을 잊은 채 타자-이방인을 이야기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소설이 바로 세실, 주희.

 

3. 무지를 인정할 수 있을 때, 어쩌면 우리

세실, 주희가 타자와의 차이에 대해 무감했던 개인이 관계맺음을 통해 자신의 위치성을 깨달아가는 과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선택함으로써 방기되어버린 무지의 영역을 문제삼았다면 씬짜오, 씬짜오는 호의를 통해 맺어진 관계가 어떤 조건들 속에서 파국을 맞이하는지를 그려낸다.

독일의 작은 도시 플라우엔에서 마주친 베트남인 가족과 한국인 가족 사이의 이야기를 담아낸 씬짜오, 씬짜오는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여겨지는 두 가족이 만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다. 최은영이 던진 거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이방인이라는 동질성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차이로 인해 미끄러지고 마는 환대의 마음이 그려내는 작은 파문(波紋)을 좇아 우리의 가능성을 점쳐볼 필요가 있다.

플라우엔에 온 지 세 달 만에 다른 집에 초대받”(67)의 가족은 기쁜 마음으로 투이네 집을 방문한다. 그곳에서 느낀 어떤 조건도 없이 받아들여졌다는 따뜻한 기분”(69)은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어 오래 지속된다. 김현경이 지적한 대로 환대를 우정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으로 파악한다면, 응웬 아줌마가 순수한 마음의 표시로 건넨 선물들은 시민적 의무로서의 환대에서 우정으로 나아가는 것에 다름아니다. 그것은 독일에 먼저 정착한 응웬 아줌마가 건조함을 견디기 위해 직접 만든 크림배관공을 부르거나 집주인과 이야기를 해야 할 때 나서서 일을 해결”(70)해주는 다정함으로 의 가족에게 전해진다. 그 다정함은 김을 좋아하는 아줌마를 위해 한국에서 가져온 김을 구워 갖다주는 엄마와, “단 음식을 좋아하는 엄마에게 쌀푸딩을 만들어”(74)주는 응웬 아줌마 사이의 교환으로까지 확장된다.

그들 사이의 충만한 감정은 서로의 언어를 넘어서는 것이어서, 베트남 노래를 부르는 응웬 아줌마 부부를 따라 뜻도 알아듣지 못할 노래의 후렴구를 어설프게 따라 하려는 엄마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가 어른이 된 후에도 이 시간을 오래도록 그리워할 수 있었던 것은, 같은 언어를 사용함에도 말이 통하지 않기에 서로를 투명인간처럼 대하던(70) 아빠를 선선히 바라보던 엄마의 눈빛”(71)이 존재했던 유일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최은영이 특유의 따스한 문체를 가감없이 발휘하여 세밀하게 그려내는 것은, 절대적 환대를 기반으로 맺어진 (것처럼 보이는) ‘의 가족과 투이의 가족의 관계가 서로에 대한 무지로 인해 어떻게 깊어지고 또 어긋나는가에 대한 것이다.

 

우리 엄마 아빠는 서로를 제일 싫어해.” 그날도 나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투이는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서 나를 쳐다봤다. 꼭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의외의 반응이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넌 왜 그런 얘길 하면서 웃어?” 투이는 그 말을 하고는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여느 때처럼 다시 내 쪽으로 돌아오리라고 생각했지만 그애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73)

 

투이를 그저 어린애로 여기는 는 어차피 그가 이해할 수 없으리란 생각에 평소처럼 속마음을 털어놓지만, 투이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그랬구나, 그랬었냐가 아닌 넌 왜 그런 얘길 하면서 웃어?”라는 질책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투이의 반응은, 그애를 이미 알고 있다고 믿으며 작은 위로를 받고자 했던 의 인식에 균열을 낸다. “화가 난 것처럼 보였던 투이가 평소처럼 에게 돌아오지 않았기에, ‘는 끝내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다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나는 그애를 조금도 알지 못했었어”(73)라고 깨달을 뿐이다.

환대해주는 상대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은 의 엄마 역시 마찬가지다. 베트남에서 나고 자란 응웬 아줌마에게 독일에서 처음 마주한 눈()은 놀라움을 넘어선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너무 예뻐서 춥다 춥다 하면서도 손이 다 얼도록 눈을 만지고 놀았”(73~74)다는 응웬 아줌마의 말에 엄마는 같이 웃어야 하는데 웃음이 나오지 않아 당황한다. 사계절이 존재하는 한국에서 태어난 엄마는 응웬 아줌마의 마음에 대해 쉬이 가늠할 수 없으며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다만 애써 같이 웃으려 노력할 뿐이다.

와 엄마가 타자에 대한 무지를 깨달아간다면, 응웬 아줌마는 알지 못함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의 가족에게 말을 건넨다. 그녀는 엄마가 사랑이 많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해주는 능력을 타고”(74)난 사람이라고 말함으로써 엄마를 엄마 자신으로 사랑해”(92)주었고, ‘에게는 바다를 가보았는지, 한국의 바다는 어떤 색인지, 가장 좋아하는 독일 음식은 무엇인지에 대해 물으며 진심 어린 관심”(75)을 표한다. 응웬 아줌마에게 태생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서로의 환경-차이-조건은,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발견하는 것 혹은 질문해야 하는 것일 뿐 관계를 가로막는 울타리가 아닌 까닭이다.

그러나 견고하게 깊어져가던 두 가족 사이의 관계는 어른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78) ‘의 얄팍한 욕망에 의해 산산히 부서지고 만다.

 

한국은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 없어요.” 나는 그 말을 하고 동의를 구하기 위해 엄마 아빠를 쳐다봤다. (중략) “넌 어른들 말하는 데 끼어들지 마. 네가 대체 뭘 안다고 떠드는 거냐!” 아빠가 한국어로 소리쳤다. (중략) 나는 마지막 용기를 쥐어짜서 독일어로 말했다. “한국에서 그렇게 배웠는데. 우린 아무에게도 잘못한 게 없다고. 우린 당하기만 했다고.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는데……

한국 군인들이 죽였다고 했어.” 투이가 말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식탁의 분위기를 얼려버리기에는 충분했다. “그들이 엄마 가족 모두를 다 죽였다고 했어. 할머니도, 아기였던 이모까지도 그냥 다 죽였다고 했어. 엄마 고향에는 한국군 증오비가 있대.” (78~79)

 

그동안의 시간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 이 날의 대화는 어차피 당신들은 이해하지 못할것이기에 응웬 아줌마가 삼켜왔던 기억-상처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폭로되었음을 드러낸다. 그것은 한국인과 베트남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으로 인해 서로에게 침묵을 강요했던 역사의 흔적이, “구역질나는 학살”(82)의 가해국임에도 불구하고 우린 아무에게도 잘못한 게 없다고”(79) 배워왔던 의 일방적이고 무지한 지식으로 인해 더이상 숨길 수 없는 것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날 학교의 수업에서 베트남전에 대한 독일인들의 반응에 대해 분노했던 의 기억과 겹쳐지면서 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으로 남는다. 2차 세계대전 이후로 대규모의 살상이 일어난 전쟁은 없었다는 선생님의 말에 투이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며 베트남전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이는 곧 반장 잉가의 자랑스러운 미소와 함께 미군만 육만 명이 죽었고 군인 아닌 베트남 사람도 이백만 명”(77)이 죽었다는 수치화된 데이터로, 나아가 선생님에 의해 미국 정부의 실책이었고, 미국으로서는 아무런 득도 보지 못한 전쟁이라는 분석된 지식으로 정리되어버린다. 당시 는 베트남전에 대해 알지 못했고, 응웬 아줌마의 고향에 한국군 증오비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역시 알지 못했으므로, “투이의 마음을 조금도 짐작하지 못하는 독일 애들에게 희미한 분노”(78)를 느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가 저녁식사의 침묵 속에서 마지막 용기를 쥐어짜서” “우린 당하기만 했다고”(79)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위치에 대해 철저히 무지했기 때문이었다. 이내 의 무책임한 분노는 부끄러움과 돌아보고 싶지 않은 상심으로 남아 성인이 된 후에 독일을 방문하더라도 애써 그곳을 외면”(90)하게 만든다.

이때 독일이라는 장소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먼저 언어의 문제를 먼저 살펴보자. 최은영이 이국을 작중 배경으로 삼은 이유는 언어의 문제와 결부되면서 보다 명확해진다. ‘의 가족과 투이네 가족은 독일어를 매개로 대화를 나눈다. 그들의 모국어는 다르기에 독일어 없이는 서로에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독일어는 두 가족 모두에게 외국어이므로, 어떤 순간에 이르면 그들에게서 사라진다. 상대가족이 알아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모국어는 쉽게 가까워질 수 없는 민족적 차이를 다시 한 번 부각시킨다. ‘의 가족과 투이네 가족 사이의 경계는 독일어로 인해 희미해졌던 것처럼 보이지만, 모국어가 등재되는 순간 바로 견고해진다. 나아가 투이네 가족 사이에서 마음을 다독이는 말”(80)로 기능하는 베트남어와, ‘의 가족 사이에서 싸움의 언어로 작동하는 한국어가 상징하는 것은, 모국어가 극적인 감정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투이네 가족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엄마의 노력이 시제와 성, 가 일치하지 않는 문장과 같은 부정확한 독일어”(82)로 나타난다는 것은, 외국인의 취약함을 가시화한다.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은 언어적 한계로 인해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하며 그 감정들을 자연스럽게 봉합해야 하는 위치에 놓여있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편으로 독일이라는 장소가 중요한 것은,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자 전쟁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국가가, 이역(異域)에서 발생한 전쟁을 대하는 태도를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교실에서 베트남은 단순히 전쟁으로 미국을 이긴 유일한 나라”(77)로 여겨질 뿐이며,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베트남인이자 피해자의 유가족인 투이는 그곳에 없는 사람으로 취급”(78)된다. 투이가 교실에서 겪어야만 했던 상처는 타자의 위치를 가늠하는 것의 지난함과, 무지로 인해 가해지는 의도치 않은 폭력을 상기시킨다. 동시에 독일이 유대인을 학살한 전력을 지녔음에도 이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기억하려는 국가라는 점에서, 베트남전에서 구역질나는 학살을 자행했던 한국의 태도와의 비교는 불가피하다.

한국의 태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자신의 형도 베트남 전쟁에서 죽었다는 아빠의 말이다. 고작 스무 살이었던 형을 잃었기에 누가 베트콩인지 누가 민간인인지 알아볼 수 없는 상황으로 베트남전쟁을 이해하려는 아빠와, 가족이 학살되는 과정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기에 태어난 지 고작 일주일 된 아기도 베트콩으로 보였을까요. 거동도 못하는 노인도 베트콩으로 보였을까요.”(81)라고 되묻는 응웬 아줌마의 대화는 개인의 삶에 새겨진 상처와 트라우마가 얼마나 지우기 어려운 것인지를 가늠하게 만든다. 가족을 잃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개인적 차원에서 그들은 전쟁의 피해자라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국가적 책임의 차원에서 그들의 위치는 결코 같지 않다.

여기에서 오혜진이 한국인의 자아상을 선량한 피해자로 규정하는 상상력에 대한 심문을 요청하며 제기한 질문, 과연 우리 남한무고한 피해자이기만 한가라는 그 당연하고도 중요한 물음을 재차 던져볼 필요가 있겠다. 자신의 위치를 피해자로 고정시켰을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은 스스로가 가해자일 수 있다는 감각의 결여이기 때문이다. 물론 국가/세대/친족 등을 가로지르는 전쟁의 문제에 있어 피해와 가해의 구분을 명확하게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를 이미 끝난 일”(81)로 치부하며 국가적 가해의 책임을 개인적 피해로 봉합시키려는 아빠의 시도가 섬뜩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러한 태도가 제도화됨으로써 의 무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조금 더 말해보자. ‘우린 당하기만 했을 뿐,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어요”(78)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이다. 이때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된 증조외할머니를 위해 반전집회에 참가했다는 세실의 모습이, ‘의 무지와 아빠의 발화 위로 덧씌워지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알려고 하면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것에 대해 침묵하거나 외면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한국의 집회에서 세실과 주희의 눈빛이 만나지 못했듯, 이날 이후 의 가족과 투이네 가족의 관계 역시 급격하게 어그러지고, 결국 만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최은영은 우리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세실, 주희와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 주희는 세실과 자신의 어찌할 수 없는 차이를 자각한 뒤에도 이를 말하지 않음으로써 애써 모른 척한다. 소녀상 앞에서 팔짱을 낀 세실과 주희는 파국도, 화해도 경험하지 않은 채 그저 서로 다른 장소에 있을 뿐이다. 박민정이 그 곤경을 고스란히 남겨두었다면, 최은영은 작은 변곡점을 둔다.

 

아무것도 몰랐던 거, 미안해.” 나는 천천히 말했다. 공원에 부는 바람이 내 말을 쓸어가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조심스럽게. 그 말이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86~87)

 

한국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 엄마는 에게 투이네 식구를 위한 선물”(84)이라며 박스를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응웬 아줌마를 기다리며 와 투이는 오랜만에 만나 대화를 나눈다. 그들이 작별을 향해 갈 때, 투이는 먼저 그날의 이야기를 꺼낸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다는 것”(87)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몰랐던 거, 미안해.”라는 말을 건넨다. 이는 세대를 뛰어넘어 발생하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한데, ‘오래도록 그애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했다는 걸 깨달”(86)으면서 사과를 건넬 수 있었던 것은 무지함이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타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을 수도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촘촘하고도 중층적으로 엮여 있는 국가적/구조적 폭력을 자각하려는 노력 없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폭력의 일부가 될 수 있음을, ‘는 투이네 가족과의 만남 그리고 관계의 균열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여기에 덧대어지는 것은 엄마의 선물이다. 추위를 많이 타는 투이네 가족을 위해 직접 만든 목도리와, 털모자, 털장갑들은 응웬 아줌마가 즐겨 쓰는 모자와 비슷한 모양이거나 머리가 커서 모자가 잘 맞지 않는 투이에게 딱 맞는 형태로 투이네 가족에게 전달된다. 엄마의 선물은 투이네 가족과 함께 보낸 시간 속의 다정함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서로의 정체성을 문제시하지 않는 선물들이 응웬 아줌마에게 건네졌을 때, 그 순간 나는 울음을 삼키는응웬 아줌마의 얼굴”(88)을 처음으로 본다.

그러나 현실은 얼굴얼굴사이의 마주침을 넘어서는 냉혹한 것이기도 해서, ‘가 건넨 사과와 엄마의 선물은 그들의 작별을 막지 못한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 끝내 응웬 아줌마를 다시 만나지 못한 엄마를 대신해 그녀에게 베트남어로 인사를 건넨다. ‘’-엄마-응웬 아줌마는 그렇게 가까스로 우리로 거듭난다. 쉽게 우리를 이야기하지 않되,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최은영의 윤리는 이처럼 씬짜오, 씬짜오에서도 변함없이 빛을 발한다.

 

씬짜오, 씬짜오. 우리는 몇 번이나 그 말을 반복한다. 다른 말은 모두 잊은 사람들처럼. (93)

 

4. ‘-우리의 공통감각을 거듭 고쳐 쓰기 위해서라면

이방인이란 누구인가. 데리다에게 이방인이란 첫 물음을 제기하면서 나를 문제선상에 올려놓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타자-이방인과의 만남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과 회의의 대상으로 삼도록 추동한다. ‘를 모른다는 것은 를 모른다는 것이다. ‘를 알아간다는 것은 를 알아간다는 것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를 통해 가 몰랐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의 위치를 확인하며 거듭 다시 태어난다. 희미한 공동체로서의 우리는 그 과정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니 이제, ‘의 차이를 어떻게 우리의 사이로 만들어나갈 수 있을지를 물어야 하지 않을까. 각자의 개별적인 위치와 거기에서 발생하는 정동, 그것을 품지 않고서 우리로 연결될 수 없다. 단수가 아닌 복수로서의 우리라는 주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차이를 보존하면서도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공동체적 가능성이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의 는 어디까지를 우리로 사유하고 있을까. ‘우리우리와 얼마나 같고 다를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같고 다름이 아니라 이를 반복해서 묻는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기이한 마주침()일 것이다.

사이를 거리 혹은 관계로 이해한다면, ‘우리로서 관계를 맺기 위해서라도 매순간 와의 거리를 가늠하는 것은 필수적이겠다. 그것은 의 위치성에 대한 자각과, ‘에 대한 무지를 인정하는 발화를 통해서 가능해질 수 있다. 그것은 동일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던 의 신체에, 젠더/민족/언어/역사/계급 등이 분명한 차이로서 교차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그 과정을 통해서 가까스로 알게 될 의 거리를 측정하고 통감(痛感)하는 것, 그 차이의 윤리로 인해 서로에게 연루된 우리가 태어날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선언보다는 선언이 지닌 수행성을 신뢰하는 나로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박민정과 최은영이 그러했듯, ‘우리에 대해 묻고 말하는 그 느슨하고도 견고한 움직임에 나 역시 함께 하겠다고. ‘로 인해 구축되어갈 -우리를 위해, 나의 언어를 부수고 굴복시킬 용기를 갖추겠다고. “다시 또다시, 여전히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으로서 만들어져 갈 -우리야말로 새로운 공통감각을 무수하게 고쳐 쓸 수 있는 존재이므로.

 

유승희(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수료)
유승희(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