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준우 기자 (jun@skkuw.com)

자과캠 만남 - 안중호(금속공학 77) 동문

사진 I 서수연기자 augenblick@
사진 I 서수연기자 augenblick@

 

“옛날 건물과 차이가 거의 없기도 하고 몇 개는 많이 바뀌었네요(웃음).” 
우리 학교에서 젊은 시절을 다 보냈다며 모교에 대해 애정을 보인 안동대 명예교수 안중호(금속공학 77) 동문을 학교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인생의 중요한 기회를 우리 학교에서 많이 찾았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물리를 좋아했던 소년, 수많은 논문을 쓰기까지
 좌절과 포기보다는 새로운 방법을 찾기를

물리를 좋아했던 어린 소년
서울에서 3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난 안 동문은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확실한 성격이었다. 국민학교 시절에 단순계산인 산수를 싫어하고 별 감상하기를 좋아했던 그는 원래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중학교에 입학하며 안 동문의 관심사는 바뀌게 됐다. 학창 시절에 물리를 접한 안 동문은 “사고를 요구하는 상대성이론과 같은 물리학 이론에 흥미를 느꼈어요”라고 밝혔다. 흥미를 좇아 물리학과에 진학하고자 했던 안 동문은 당시의 사회 분위기로 인해 물리학과를 선택하지 못했다. “취업이 잘 되는 의대나 공대를 가야 한다는 분위기로 인해 의대를 준비했었어요.”

이후 전기대에 진학하지 못한 안 동문은 후기대 중 가장 선호했던 우리 학교에 들어오기로 마음먹었다. 안 동문이 진학한 70년대에는 우리 학교에 의대가 없었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공대에 진학했다. 생소한 학문에 대한 도전 정신과 취직의 가능성을 함께 고려한 결과, 안 동문은 우리 학교 금속공학과를 선택했다. 안 동문은 “기계공학과나 다른 학부는 다소 흔한 것 같았고 전기공학과는 수학을 많이 써서 선택하지 않았어요”라며 다른 과를 택하지 않은 이유를 밝혔다. 이어 그는 “흔하지 않은 학문에 대한 이끌림과 포항제철에 들어갈 수 있겠다는 미래에 대한 보장이 돼 있는 듯한 학과였어요”라며 금속공학과를 선택한 이유를 덧붙였다.

우여곡절 많았던 대학 생활
“처음에는 금속공학이 무엇인지 잘 몰랐어요.” 금속공학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는 상태로 진학한 안 동문은 처음엔 학과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머지않아 전공의 매력을 발견하고 그는 학과 공부에 빠져들게 됐다. 예상과는 달리 금속공학은 물리학, 화학과 같은 기초 과학 지식에 관련된 것을 공부했기 때문이다. 안 동문은 “금속공학 중에서도 평소 좋아하던 물리학과 관련된 분야인 금속물리학에 빠졌어요”라며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해보자”는 생각으로 세부 전공을 정했다고 말했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학자가 되자는 목표를 세운 안 동문은 유학을 결정했다. 유학 국가를 결정할 때 역시 대세에 편승하려 하지 않는 그의 성격이 드러났다. 당시 학생들이 많이 선택하지는 않았던 유럽으로 유학 국가를 결정한 것이다. 이어 그는 수학할 학교를 선택하던 당시를 떠올렸다. “당시 유럽에서 공학으로 유명한 학교 중 독일어를 쓰는 곳과 프랑스어를 쓰는 곳이 있었어요. 저는 필수 교양으로 들었던 독일어 수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랑스어 공부를 선택했죠.” 더불어 그는 단어의 길이가 길고 배웠던 소설의 분위기가 어둡다는 이유 등으로 독일어 수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한편 프랑스어 공부 역시 마냥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는 “당시 *문무대 훈련이라 불렸던 교련 수업에 참여하지 않아 관련 학점을 이수하지 못했어요”라며 “강제 입영해야 하는 처지였죠”라고 전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안 동문은 청계천 시장에서 산 프랑스어 책으로 군 생활 3년간 프랑스어를 독학하며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1974년 당시, 군 강제 입영과 동시에 제적을 당했기 때문에 안 동문은 1977년 우리 학교에 재입학했다. 이후 그는 우리 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의 도움으로 프랑스 문화원에서 열리는 프랑스어 수업을 들으며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됐다.

한편 안 동문의 학문적 관심은 금속공학에 국한되지 않았다. 성대문학상의 전신인 성균문화대상에 기고한 논문으로 1978~1979년에 연달아 상을 받기도 했다. 1978년에는 ‘종교와 과학’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썼다. “학창 시절부터 줄곧 다양한 분야에서 생각하고 메모하는 습관 덕에 논문을 일필휘지로 쓸 수 있었죠.” 이어 그는 “친구들이 논문을 써서 상을 받았다는 사실을 못 믿어 당시 우리 학교 정문 앞에 있던 카페에 모여 논문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원고지에 작성했어요”라며 웃었다. 특히 1979년에 상을 받을 수 있던 이유는 당시 우리 학교의 캠퍼스와 관련이 있었다. “당시에는 인문사회과학캠퍼스와 자연과학캠퍼스가 분리돼 있지 않았고 공학 전공의 학생이 이수해야 하는 인문사회과학 필수 교양 과목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죠.” 이어 안 동문은 교양 과목 중 문과 과목 교수님들과 인연이 깊다며 특히 우리 학교 유학대학 류승국 교수의 수업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지금은 성균논어라고 불리는 과목일 텐데 당시엔 정말 사서삼경을 모아 놓은 두꺼운 책으로 공부를 했어요. 그래서 수업에서 배우는 범위가 책의 일부라 하더라도 공부해야 할 분량이 많았던 과목이었죠.” 이어 안 동문은 “마침 1979년 논문 주제가 ‘동양사상과 서양사상’이었어요”라며 수업의 내용과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을 접목해 좋은 논문으로 상을 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재료공학에 관심을 가진 청년, 연구에 뛰어들다
처음에 목표로 했던 프랑스 유학이 어려워지자 안 동문은 “프랑스어를 쓰는 다른 나라에 가면 되지”라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벨기에 유학을 결정했다. 이어 안 동문은 유학 당시 겪었던 여러 어려움을 떠올리기도 했다. “박사 학위를 딸 당시 금전적으로 힘들었는데 기숙사 및 내부 시설이 잘 돼 있고 학비가 당시 돈으로 1만2000원으로 저렴해서 다행이었죠. 게다가 유럽은 열 명 중 한 명만 졸업할 정도로 졸업이 어려운 체계여서 더욱더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아요.” 바쁘게 공부한 안 동문은 유럽에 있는 동안 한국에 한 번도 가지 못했다고 했다. “대사관에 가면 한국에서 온 신문이 다발로 쌓여있었어요. 여러 달 치의 신문을 한꺼번에 가지고 와 읽으며 한국 소식을 알았죠.”  

그렇게 벨기에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가 연구를 이어가고자 한 안 동문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귀국하게 됐다. 한국으로 돌아온 안 동문은 한국기계금속시험연구소(현 한국기계연구원)의 연구원으로 재직하게 됐다. 당시 경제적 여유가 없던 그에게 박사 학위생을 대상으로 채용하는 유치과학자 제도는 절호의 기회였다. 안 동문은 “지도교수님도 좋은 분이셨고 연구 분야도 평소 좋아하던 분야여서 더 열심히 일하게 됐어요”라며 전공에 대한 자부심을 보였다. 그러나 논문을 작성하는 것보다는 연구비를 받아올 수 있는 연구 실적이 중요시되고 국가기관에 소속돼 자유로운 연구가 어렵다는 점이 안 동문에게는 한계로 다가왔다. “이런 한계점을 느끼던 중 시설 및 연구 지원에 적극적인 안동대학교의 교수직에 흥미가 생겨 재직하게 됐어요.”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안 동문은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던 대학원생과의 관계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라고 밝혔다. 그는 같은 연구실에서 일했던 대학원생들과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며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며 실험실 동료들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밝혔다. 안 동문은 학업에 열정을 보이는 대학원생을 아낌없이 지원했다. 당시를 떠올리며 안 동문은 “유학 및 연구에 있어서 손이 닿는 대로 도움을 줬어요”라며 “그 학생이 호주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지금은 교수직을 하고 있어요”라고 교수 재직 중 뿌듯함을 느낀 순간을 말했다.

안 동문이 주로 연구하는 주제는 나노 신소재와 초전도체다. 안 동문은 “일본에서 연구되는 *비스무트계 고온 초전도체 연구를 비롯해 호주 등 다양한 연구 주체에서 초청을 받았었어요”라며 연구에 최선을 다했음을 밝혔다. 더불어 재료공학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안 동문에게서 그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재료공학은 모든 것의 기본이죠. 눈에 보이지 않는 것, 특히 우리 주변에 있는 것들을 이루는 분말을 연구하는 것이죠”라고 말했다. 안 동문은 국내외 160편에 달하는 학술논문을 작성하면서 학회에서 인정받기도 했다. 다양한 학회에 소속돼 학회의 편집장을 맡으며 재료공학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특히 2013년에는 4대 재료공학 학회 중 하나인 한국분말야금학회에서 회장을 맡았다. “여기서 말하는 분말은 흔히 말하는 가루가 아니라 우리 주변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을 의미하고, 야금은 금속을 의미하죠. 그래서 우리 주변에 있는 금속들을 다루는 학회예요”라며 학회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과학을 바라봤으면

안 동문은 학생들이 과학을 쉽게 바라보길 바란다는 소망을 말하며 과학에 대한 소신을 밝혔다. 그는 “과학은 ‘무엇은 무엇이다’와 같은 정의를 외우는 것보다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출발하는 공부”라며 “과학에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이러한 안 동문의 호기심은 그가 책을 내는 추진력으로까지 작용했다. 그가 대학 시절부터 오늘날까지 배움에 있어 느꼈던 궁금증들에 대한 해답을 적어둔 것이다. 안 동문은 “재료과학과 별개로 종교부터 물리학까지 살아오며 의문이 들었던 다양한 내용을 담았어요”라며 “상업적 목적보다는 스스로 생각을 정리해보는 목적이 컸어요”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대중들이 과학은 어렵다는 편견을 깼으면 좋겠어요. 간단한 사실에서부터 흥미를 찾아 과학을 쉽게 느끼길 바라요”라고 덧붙였다. 특히 안 동문은 “벨기에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선 문제를 풀 때 문제를 푸는 것 자체보다 왜 푸는가에 의의를 두는 것 같아요”라며 우리나라는 과학을 다소 암기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더불어 안 동문은 계속해서 책을 저술하고, 기초과학 실험을 하는 등 사람들이 과학을 쉽게 바라보는 것에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성균관 후배들이 공부의 재미를 알게 됐으면
안 동문은 “좌절과 포기를 멀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자세가 중요해요”라며 후배들에게 격려의 말을 남겼다. 이어 “어떠한 목표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무엇이든 달성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야 해요”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나 역시 세계에서 저명한 석학이 되자는 목표를 이루는 데 많은 난관이 있었어요”라면서도 “그때마다 다른 길을 찾아 새로운 목표로 향한 결과 목표를 이룰 수 있었죠”라며 진심 어린 조언을 전했다. “실적을 위해 공부하지 말고,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을 공부하길 바라요.” 더불어 그는 연구원 시절과 교수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공부하는 마음가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마지막으로 안 동문은 “문과와 이과를 구분하지 않고 전공을 넘나드는 다양한 공부를 해보는 것도 제일 중요한 부분 중 하나라 생각해요”라는 당부의 말을 남겼다.

 

*문무대=육군학생군사학교를 부르는 다른 말.
 *비스무트계 고온 초전도체=1988년 일본의 마에다 박사가 최초로 합성해 임계온도가 110K(Bi-2223)로 매우 높은 초전도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