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규리 기자 (kimguri21@skkuw.com)

치자로 물들이고 인두로 피워낸 꽃
태평성대의 염원을 담은 조형미

 

매화가 막 개화하기 시작한 겨울과 봄의 경계에서 경상남도 양산시 매곡리에 있는 한국 궁중 꽃 박물관을 방문했다. 폭포 정원에서 떨어지는 맑은 물소리를 들으며 정원 가운데 깔끔하게 포장된 삼도(三道)를 걸었다. 그 끝의 팔각지붕 아래 전통 창호가 열리자 채화는 장엄한 빛을 드러냈다. 김주영 궁중 채화 이수자·나은비 궁중 꽃 박물관 학예연구원과 함께 전시실을 거닐며 채화의 멋을 담뿍 느껴봤다. 

채화가 피어나는 그곳을 엿보다  
궁중 채화를 제작하는 작업실 벽에는 다양한 색깔로 염색된 천이 둘둘 말려 보관돼 있었다. △노란 치자 △붉은 홍화 △푸른 쪽을 활용해 기본 원료인 삼원색을 마련한다. 염료에 물들이는 횟수에 따라 색의 깊이도 다르다. 김 이수자는 “자연 염색은 화학 염색과 달리 얼룩덜룩한 멋이 있다”고 그 매력을 설명했다. 통기성이 좋아 여름에 옷을 지어 입던 모시나 삼베와 같은 천은 주로 여름꽃을 만들 때 활용된다. 도라지꽃이 대표적이다. 염색한 천에는 풀을 먹여 빳빳한 형태를 유지하게 한다. 그 천을 인두로 달궈 꽃잎을 연상케 하는 둥그런 모양을 낸다. 책상 위의 화로가 독특한 모양새로 눈길을 끌었다. 김 이수자는 “호일을 삽입한 형태의 화로를 특수 제작했다”며 화로 안에 놓인 인두 세 개에 각각 △칼인두 △코인두 △콩인두의 이름이 붙어 있다고 말했다. 그는 “평면적인 자료만 갖고서 입체적으로 꽃을 만들기는 어렵다”며 “꽃이 피는 시기에 여러 번 관찰해 이파리의 모양새나 꽃이 돋는 모습을 살핀다”고 채화 작업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수로재의 팔각지붕 아래 펼쳐진 연회  
수로는 설립자 황수로 궁중 채화장의 *아호다. 이곳에는 ‘고종정해진찬의(高宗丁亥進饌儀)’가 재현돼 있는데 이는 고종 24년에 대왕대비인 신정왕후의 팔순을 기념한 잔치다. 둥글게 높이 쌓아 올린 음식 가운데에 채화가 꽂혀 있었다. 몇몇 음식에는 포도나 유자 같은 과일을 상화로 올렸는데 그 모습이 신기하게 다가왔다. 김 이수자는 “씨앗이 많은 열매는 자손이 계속 번영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며 꽃이 아닌 과일을 상화로 올린 의미를 설명했다. 일월오봉도는 왕의 뒤를 장식하던 병풍으로, 해와 달이 동시에 뜬 모습을 통해 음양의 조화를 보여준다. 어좌의 양옆을 장식한 홍벽도화준의 색도 음양의 조화를 맞춘 것이다. 풍성하게 맺혀 있는 꽃송이는 무려 이천 송이에 달한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준화는 9자 5치의 길이로, 이를 현대의 단위로 표현하면 2.85m에 이르는 장대한 규모다. 가지에는 꽃송이와 함께 벌이나 새 등을 볼 수 있었다. 꽃에 날아드는 조충은 신하나 백성이 왕에게로 향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김 이수자는 “꼭대기의 봉황 두 마리는 태평성대에만 나타난다고 하는 상상의 동물”이라며 “왕과 신하, 백성들이 조화를 이뤄 태평성대를 만들 것이라는 의미를 담아냈다”고 준화의 염원을 전했다. 

오른쪽으로는 신정왕후의 잔칫상을 재현해뒀다. 그 가운데에는 가장 큰 크기의 상화가 꽂혔는데, 큰 연꽃 몇 송이를 중심으로 형형색색의 꽃이 주위를 장식하고 있었다. 김 이수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대수파련(大水波蓮)이라는 이름의 채화로, 연꽃이 마치 파도를 이루는 것과 같아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대수파련은 연회 자리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자 혹은 주인공에게만 올릴 수 있었다.
 
타조 깃털이 장식한 구름 위의 당신 
수로재 우측의 풀밭으로 들어서자 한옥과 현대 건물이 조화된 비해당이 나왔다. 지하에는 장지마을 내실이라는 이름의 전시가 있었다. 이는 대한제국의 황후인 순정효황후가 6·25 전쟁 시절 부산의 장지마을로 피난했을 때 생활했던 공간을 재현한 것이다. 서늘한 공기와 나무 향이 섞인 냄새가 엄숙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김 이수자는 “궁궐이 서울에 있는 만큼 다른 지역에서는 궁궐 문화를 오롯이 보고 느끼기 어렵다”며 “마지막 황후였던 순정효황후가 양산과 가까운 부산에서 보낸 피접 생활을 담아내 궁궐 전통을 느낄 수 있게 했다”고 장지마을 내실을 복원한 이유를 설명했다. 

양쪽에 기다랗게 세워진 꽃은 지금까지 봤던 채화와는 조금 달랐다. 구름 같은 흰 꽃과 상사화가 있었는데, 흰 꽃은 타조 깃털을 활용해 만든 것이다. 나 학예연구원은 “타조 깃털은 구름 같은 모습 때문에 귀한 소재”라며 “상사화는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는 특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 둘이 함께 모여 ‘구름 위의 당신’이라는 의미가 되는데, 이는 순정효황후를 기리기 위함이라고 한다. 

궁중 채화를 품은 박물관은 그 소재인 꽃처럼 우아하게 피어오른 공간이었다. 비단으로 자아낸 각양각색의 꽃을 보고 싶다면 한국 궁중 꽃 박물관을 방문해보는 것은 어떨까. 
 

고종정해진찬 재연.
고종정해진찬 재연.
사진 I 손민정 기자 0614smj@
홍도화준의 나비와 새.사진 I 손민정 기자 0614smj@
홍도화준의 나비와 새.
사진 I 손민정 기자 0614smj@
홍도화준 위의 두 마리 봉황.사진 I 손민정 기자 0614smj@
홍도화준 위의 두 마리 봉황.
사진 I 손민정 기자 0614smj@
천을 보관하는 모습.사진 I 손민정 기자 0614smj@
천을 보관하는 모습.
사진 I 손민정 기자 0614smj@
박물관 전경.사진 I 손민정 기자 0614smj@
박물관 전경.
사진 I 손민정 기자 0614sm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