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규리 기자 (kimguri21@skkuw.com)

 

채화(彩花)는 비단으로 만든 꽃이란 뜻으로, 궁중에서 쓰여 궁중 채화라 한다. 아름다운 우리의 전통문화지만 일견 그 호칭은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의궤 속의 기록으로만 존재했던 채화를 실제 모습으로 복원한 것은 황수로 궁중 채화장이다. 궁중 채화가 무형문화재로 등록되던 때의 우여곡절과 박물관을 손수 세우기까지, 궁중 채화에 매진한 그의 일생을 직접 들어봤다. 

시들지 않는 영원한 꽃을 그리며  
전통적으로 꽃은 다양한 의식에서 장식으로 쓰였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생명을 존중하는 의식이 자리 잡아 살아있는 꽃을 꺾지 않고, 비단이나 종이로 만든 가화(假花)를 썼다. 무속에서는 종이로 꽃을 만들어 굿이 끝나고 나면 불태워 하늘로 돌려보냈고, 불가에서는 연등회나 팔관회를 준비하며 가화를 만들었다. 궁중을 장식한 채화는 비단으로 만든 가화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삼 일만 지나면 시들고 말아요. 옛날 왕족들은 오래 살지 못했기 때문에 영원무궁한 왕조를 염원했어요. 그래서 왕족의 불멸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시들지 않는 꽃을 썼지요.” 

연회가 벌어지면 가화는 의식주를 구분하지 않고 다양한 용도로 사용됐다. “제사를 지낼 때나 임금께 음식을 올릴 때도 꽃을 꽂았어요. 음식 위에 꽂힌 꽃은 상화(床花)라고 불려요. 음식 자체에 꽃을 장식하는 문화는 드문데, 우리나라는 상화가 잘 발달돼 있었어요.” 연회가 열리면 문무 대신부터 호위 무사까지 모든 사람이 임금이 하사한 꽃을 머리에 꽂았다. 이는 잠화(簪花)라는 이름의 문화로, 신분을 나타내는 장치가 되기도 했다. 조선 시대가 되며 꽃 사용은 *국조오례의 등을 중심으로 화려한 의례 문화가 발달해 더욱 세분화됐다. 준화(樽花)는 항아리(樽)에 꽂힌 꽃을 의미하는데, 홍벽도화준은 임금이 앉은 자리의 양옆을 각각 붉고 푸른 복숭아꽃으로 장식한 것을 의미한다. 그중 붉은 복숭아꽃인 홍도화준은 2017년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청와대 국빈만찬 자리를 장식하기도 했다. “꽃이 드문 11월에 자리를 화사하게 장식했다는 평가를 들었다”며 김주영 궁중 채화 이수자는 당시를 설명했다. 

비단이 꽃으로 피어나려면 장인의 손길이 필요하다. 화장(花匠)은 궁중에서 전문적으로 꽃을 만드는 장인이다. 황 화장은 “이 칭호는 고려사부터 나와요. 상의국은 임금이 평소에 쓰는 귀물을 만드는 곳인데, 그곳에 소속된 약 30명 이상의 화장들이 계절에 따라 꽃을 만들었어요”라며 기록을 설명했다.

평생을 꽃과 함께하다  
황 화장의 외가는 제사를 지낼 때면 꽃을 만들곤 했다. 이를 통해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꽃 문화를 익혔다. “외조부께서 *궁내부 주사라는 벼슬을 하며 하사받은 어사화가 외가에 전해내려 왔어요. 그걸 보며 꽃이 참 예뻐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일본 유학 시절 *이케바나를 배울 때, 황 화장은 선생에게서 꽃꽂이와 채화의 근원이 일본이라는 말을 듣곤 했다. 그는 어린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면서도 명확한 근거를 댈 수 없어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래서 전통문화를 연구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와 동아대 사학과에서 공부했어요.” 때마침 정부에서 동아대에 고려사 국역 작업을 맡겼고 그는 조교의 신분으로 작업에 참여했다. “고려사에 채화가 나와 역사적 근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렇게 한번 채화를 만들어보자고 결심했지요.” 

황 화장은 처음에 채화를 연구하던 시절 자료를 찾으며 겪은 어려움을 밝혔다. “한국민속박물관에서 조그만 어사화를 하나 찾았지만 완전히 마모돼 버려 천의 종류나 색도 알 수 없었죠. 불멸을 꿈꾸는 채화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꽃의 표정도 잃고 생기도 잃어요.” 

당시에 채화 문화가 생소했던 만큼, 인간문화재가 되기까지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 채화를 출품한 황 화장은 심사위원들에게서 의심 어린 시선을 받았다. “동대문 시장에서 조화를 사 온 게 틀림없다며,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한 개인이 이토록 많은 작업을 소화할 수 있느냐는 반응이 많았다”며 어려움을 회고했다. 당시 심사위원인 김삼대자 전 문화재위원이 황 화장의 작업 모습을 비디오로 촬영한 것을 증거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됐다. 

양산시 매곡리에 피어난 한 송이 박물관
전통문화의 매력을 묻자 황 화장은 “옛것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요”라며 온화하게 미소했다. “자기 문화를 존중하고 사랑하면 긍지와 자존감을 얻을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전통에 대한 긍정이나 자부심이 부족한 편이에요. 이러한 현상에는 기성세대가 전통을 제대로 전수하지 못한 책임도 있어요.” 그는 채화가 브로치와 같은 장신구나 인테리어 소품으로 재활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전통이 긴 생명을 갖기 위해서는 일상에 스미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이다.

황 화장이 양산시 매곡리에 박물관 터를 잡은 이유는 불모지에 문화를 심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우리나라는 궁궐과 대다수의 박물관이 다 서울로 집중돼 있어 지방의 문화생활은 상대적으로 열악한 편이죠. 시골에 박물관을 짓는 게 뜻깊겠다고 생각했어요.” 

한편 황 화장은 “만약 앞으로 5년의 시간이 더 있다면 다도 박물관과 궁중 채화를 가르칠 수 있는 학교를 만들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그는 이를 통해 전통에 대한 관심을 젊은 세대에게 환기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다음에 다시 박물관을 방문한다면 옆에 들어선 학교를 볼 수 있을 것이라며 미소한 황 화장은 기자를 배웅했다. 
 

*국조오례의=조선 전기 문신 신숙주·정척 등이 국가의 기본 예식인 오례에 관한 내용을 엮어 1474년에 편찬한 책.
*궁내부=구한말에 왕실에 관한 모든 일을 맡아보던 관아.
*이케바나=일본 전통 예능의 하나로 풀·나무·꽃 등을 꽃병에 담아 감상하는 행위.

 

황수로 화장.사진 I 손민정 기자 0614smj@
황수로 화장.
사진 I 손민정 기자 0614sm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