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손재원 기자 (magandsloth@skkuw.com)

 

자과캠 만남 - 유홍규(전기공학 73) 동문

사진 | 옥하늘 기자 sandra0129@

잘 놀던 청년에서 
주변을 받쳐주는 리더로 
시골에서 자라 서울에서 싹튼 삶, 
월성에서 꽃피다

“원자력발전소(이하 원전)가 자식이라기에는 너무 크죠.” 
대우건설에서 오랜 기간 원자력 업무를 전담해온 유홍규(전기공학 73) 동문은 원전 건설에 대한 소감을 묻자 웃음을 보였다. 
옛 대우건설 사옥 근처의 카페에서 월성 원전과 함께 걸어온 그의 인생 얘기를 들어봤다. 

의사를 꿈꾸던 소년, 공대에 가다  
“좀 유별난 학생이었죠.” 유 동문은 본인의 학창 시절을 돌아보며 답했다. 호두 산지로 유명한 천안시 광덕면에서 자란 유 동문은 중학생 때부터 의대에 가겠다는 목표가 확고했다. “그때부터 깨끗하고 여유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중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할 때는 당시 시골에서는 보기 드물었던 피아노를 치고 친구와 함께 기타를 배우기도 했다. 유 동문은 재수를 하면서까지 도전했지만 결국 의대에 합격하지는 못했다. 이에 대신 선택한 학과가 우리 학교의 전기공학과(현 전자전기공학부)다. 당시 유 동문의 주변에는 한국전력공사(이하 한전)에 재직 중인 친척이 많았다. 자연스럽게 전기나 엔지니어 일에 대한 관심이 커져 유 동문은 공대에 진학하게 됐다. 

열심히 놀며 폭넓게 교류했던 성균관의 봄
공대에 다니며 자과캠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을 것 같지만 뜻밖에도 유 동문의 학창 시절은 주로 명륜동에서의 기억으로 채워져 있었다. “당시에는 자과캠이 생긴 지 얼마 안 됐어요. 4학년 수업 일부만 율전동에서 들었죠. 그때는 주변 시설이 많은 것도 아니어서 전철에서 내리면 공동묘지를 지나 학교에 가야 했어요.” 이어 그는 “수업이 끝나고 근처 포장마차에서 막걸리 한잔하던 기억이 나네요”라고 웃으며 털어놨다. 

당시 유 동문은 전공 수업에 재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그는 학점 취득을 위해 의무적으로 수업을 들었다며 성적은 취업에 필요한 수준으로만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정도였다고 부연했다. 그러나 학창 시절에 배운 전문적인 이론과 지식이 무용지물은 아니었다. 유 동문은 이후 원전 설계도를 현장에 적용할 때 전공 수업에서 다룬 기본적인 원리가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좋은 교수들을 만난 것도 귀중한 경험이었다. 특히 그는 전공 수업을 맡았던 안두수 교수에 대해 “인격적으로도 존경한 교수님이었어요. 졸업한 후에도 꾸준히 연락을 드렸죠”라고 전했다. 또한 유 동문은 기억에 남는 수업으로 유학(현 성균논어)을 꼽았다. “당시 교수님이 굉장히 유명한 서예가셨고 강의도 꽤 특색이 있었어요. 유학 사상이나 동양철학 쪽에도 관심이 갔죠.” 

유 동문이 대학에서 얻게 된 소중한 기억들은 주로 사람에게서 왔다. 그는 “학교 다닐 때 정말 열심히 놀았어요”라며 “운동장에서 일부러 창경궁 쪽으로 공을 넘겨 그 핑계로 놀러 다니기도 했죠”라고 떠올렸다. 그때의 창경궁 벚꽃과 야경은 지금까지도 그가 떠올리는 추억이 됐다. 또한 학교 생활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 것은 중앙동아리 활동이었다. 유 동문은 캠퍼스학생회 6기 출신으로 캠퍼스학생회는 현재까지도 봉사와 농활을 진행하는 약 50년 역사의 중앙동아리다. “농활 등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사람을 많이 만났어요. 아직도 선후배 간 교류를 많이 하죠.” 유 동문이 학교를 다녔던 시기는 민주화운동과 시위 등의 영향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기도 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휴강한 수업이 많았어요. 어떻게 보면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캠퍼스학생회를 통해 대학 활동의 의미를 찾았던 것 같아요.” 

학창 시절에 얻은 자산을 묻자 역시 인간관계라는 답이 돌아왔다. 다양한 생활 환경을 지닌 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은 교류를 했던 것이 이후에 유 동문에게 큰 도움이 됐다. “본격적으로 사회에 나가기 전의 가치관이나 성격이 주로 이 시기에 형성됐죠.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관계를 맺는 경험을 끊임없이 했으니까요.” 고등학교 시절에 대학 진학을 목표로 획일적으로 살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고 한다. 다채로운 사람을 만나며 생각이 깊어진 덕분이다. 그러나 유 동문은 “서울보다도 어린 시절 시골에서 보낸 기억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며 자신의 근본은 고향에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로 대학을 온 것이 도움이 됐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뿌리는 태어나서 자란 천안에 있지만 서울이라는 넓은 세상으로 나와서 줄기를 뻗었죠”라고 답했다. 

희생 위에서 창조하고 도전하라 
“4학년 때 부산 화력발전소로 실습을 나갔어요. 한전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가보니 생각과는 달라 실망하기도 했죠.” 유 동문은 취업 과정에서 한전과 방송국에 모두 합격해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지방 송신소에서 근무하는 방송국은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한전을 택해 인천에 있던 화력발전소에서 5년간 근무했다. 이후 대우건설에 경력직으로 입사하며 32년에 걸친 그의 ‘대우 인생’이 시작됐다. 그는 “이란에 화력발전소를 새로 지으려던 때라 건설준비팀에 합류했죠”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당시는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미국이 이란 공습을 막 시작하던 시기라 현장 인원이 모두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유 동문은 다시 해외 파견을 지망해 리비아로 발령됐다. “수도 트리폴리에 있는 본부에서 주로 일했지만 사막을 포함해서 리비아 전역을 돌아다니기도 했어요.” 

유 동문이 맡았던 일은 현장에서 전기와 관련된 설계를 확인하고 견적을 내는 등의 업무였다. 리비아와 한국 간 정식 수교가 이뤄지기 전 대우건설은 도로와 학교, 정부종합청사, 병원 등 다양한 공사를 도맡았다. “공사 대금은 달러인데 원유로도 받았어요. 이탈리아에 정제 공장을 짓고 정제유로 가공해 국내에 들여왔죠. 그게 대우그룹의 발전에도 꽤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유 동문은 당시 대우그룹의 모토가 도전과 창조, 희생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에 해외 근무에 있어 직원 개인에게 희생이 요구되는 부분도 있었다. “지금은 4개월을 근무하면 휴가를 3주 정도 주지만 그때는 8개월을 근무하면 2주 휴가를 받았어요. 일이 늘어나면 1년을 넘겨 귀국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 덕분에 회사가 성장한 점도 무시할 수 없죠.” 그렇게 해외에서 근무하며 인생에 있어서의 경제적인 밑받침도 마련할 수 있었다. 

동시에 직원의 재량권을 중시하는 자유로운 사내 분위기 속에서 유 동문 역시 이와 비슷한 가치관을 갖게 됐다. 임원으로 재직하며 얻은 조직 관리의 노하우를 묻자 그는 “직원들 스스로 성장할 수 있게끔 인도하는 역할에 충실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받쳐주는 것도 리더의 책임이니까요”라고 답했다. 

월성에서 세계로···
미래를 향한 가교, 원전 건설 

유 동문은 20년 동안의 원전 건설 역사를 함께했다. 대우건설이 처음으로 월성 3·4호기 시공에 참여할 때 유 동문은 자진해서 원전 건설 현장으로 일터를 옮겼다. “당시 화력발전소와 비교하면 원전 쪽이 훨씬 더 기술집약적이었죠. 특히 월성 원전은 기존의 고리 1·2호기와 다른 중수로형 원전으로 건설됐어요.” 월성 3·4호기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치면서 대우건설은 한국 원전 건설의 큰 축을 담당하게 됐다. 유 동문은 신월성 1·2호기의 건설 현장 소장을 맡아 모든 업무를 총괄했다. 그는 “새로 시작하는 단계였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맡아서 잘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어요”라고 전했다. 실제로 그는 첫 설계부터 시운전까지 다양한 신(新)공법을 적용한 신월성 건설 과정을 직접 지휘했다.

“현장에서 일할 때는 인간관계도 상당히 중요해요.” 유 동문은 현장 소장 근무 당시의 일화를 소개했다. 그의 지휘 하에 여러 분야의 부서장이 근로자들을 감독했다. 그는 “나이도 가치관도 다른 사람들이 함께 일해야 했죠. 당연히 본인 부서의 일이 먼저일 수밖에 없는데 나를 우선시하다 보면 현장 운영이 힘들어져요”라고 말했다. 마음이 모이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해 내린 결정은 새벽 5시에 만나 함께 산행을 하는 것이었다. 유 동문과 부서장들 모두 가족과 함께 살지 않고 직원 아파트에 거주하는 상황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쉽지는 않았지만 1년 정도 꾸준히 했더니 서로 배려하고 양보하는 게 보였죠. 지금까지도 서로 연락하면서 이제는 형님 소리를 듣고 있네요.” 유 동문은 웃으며 “직장 동료를 넘어 가족 같은 사이가 돼 여전히 고맙다”고 말했다. “대원사모라고 있어요. 대우 원자력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유 동문은 그렇게 완성된 원전을 볼 때마다 뿌듯하다고 전했다. “아무것도 없던 땅에 거대한 발전소가 생겨서 전기를 생산하고 있잖아요. 지나다니면서 자부심을 느끼죠.” 그는 대우건설 원자력사업단장을 맡아 원전 건설에 참여한 공로로 *산업포장을 받기도 했다. 유 동문은 “한국의 원전 기술력은 자체적으로 원전을 만들 정도로 훌륭하고 해외에서도 인정받고 있다”며 국내 기술의 우수함에 대해 확신에 찬 어조로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국내 기조가 탈원전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한국수력원자력이나 기업이 폴란드 등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는 상황이에요”라고 아쉬움을 표시했다. “걱정되는 건 국내 사업 규모가 줄어들면서 앞으로의 인재 양성에 있어 맥이 끊기지 않을까 하는 부분이죠. 기술은 끊임없이 발전돼야 하는데 정체되면 오히려 퇴보할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유 동문은 후배들의 가능성을 믿는다며 국내 기술력은 충분히 더 나아갈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향후 원자력의 전망에 대해서도 말을 보탰다. “현재의 원자력 발전은 국내 전력 생산에도 도움이 되지만 핵융합발전으로 가기 전 일종의 가교 단계이기도 해요. 지금의 기술도 훌륭하지만 계속해서 위험 요소를 줄이고 있죠.” 한편 국내에도 가동 중단 단계에 들어서는 원전이 있지만 원전에 대한 해체 사업은 자체적인 기술이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원전 해체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외국 기업과 협력해 기술을 개발하고 발전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 첫 대상은 고리 1호기가 되겠죠.”

젊음이 주는 무한한 가능성 펼치길 
지금까지 삶을 지탱해준 것이 무엇인지 묻자 유 동문은 부모님의 기도라고 답했다. 이제 신앙생활에 열성을 다하고자 한다는 그는 “삶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봉사도 하고 다른 사람과 나누며 살고 싶다”고 덧붙였다. “지금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때문에 따로 하는 게 없지만 나중에라도 원자력과 관련해 후배들에게 자문하거나 조언을 줄 일이 생긴다면 당연히 가야죠.” 유 동문은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한마디 조언을 남겼다. “꿈이 중요한 것 같아요. 목표를 너무 크게 잡을 필요도 없지만 아무것도 없다면 세상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삶이 되지 않을까요. 자신이 이룰 수 있는 한계까지는 어떤 의지를 갖고 부딪쳐 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하는 것도 필요하겠죠. 젊다는 건 그만큼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니까요.”

산업포장=포장은 훈장과 표창 사이의 단계. 산업 발전에 힘쓴 이들에게 수여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