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시인 기형도는 청춘의 우울한 상징이자 위로였다. 그의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89)은 청춘들 사이의 선물 목록 1순위였고 여전히 스테디셀러이다. 그는 1989년 3월 7일 새벽 서울 종로의 한 심야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는데, 뇌졸중이 사인이었다. 그의 시 『빈집』은 열렬하게 전파되고 읽혔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집』 전문

이제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빈집』을 비롯해서 『홀린 사람』과 『엄마 걱정』이 등재되었다. 기형도는 한국시문학사의 정전이 되었고, 그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근대서지학회에서 조사한 바 한국 100권 시집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의 시 『대학 시절』, 『오래된 서적』, 『위험한 가계·1969』, 『여행자』, 『안개』 등은 널리 읽힌다.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부분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는 구절은 청춘들이 가슴을 치며 읊조리는 노래가 되었다. 동명의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시집의 표제작인 『입 속의 검은 잎』은 난해하고 난감하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 그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 놀란 자들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 …(중략)… /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부분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달라붙는 ‘검은 잎’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공포의 정체는 무엇인가? 말하지 못하고 굳어버린 ‘혀’들이 망령처럼 거리에 흘러넘치고, 말할 수 없음과 그것을 뚫고 말해야 하는 시인의 운명, 비명과 울음으로밖에 작동하지 않는 혀, 공포에 질려 더듬거리는 혀와 입, 구천을 떠도는 망령들의 못다 한 꿈이자 언어로서 잎, 악착같이 매달리는 잎이 나는 두렵다.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많은 이들은 『입 속의 검은 잎』을 광주의 알레고리로 읽는다. 5월 광주와 ‘1987’을 겹쳐서 기형도가 마주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두렵고 더듬거리는 이 와중에 『누가 내 누이의 이름을 묻거든』(작은숲, 2021)이라는 시집이 배달되어 왔다. 비가 오는 1991년 5월 25일 시위 중 대한극장 앞에서 압박 질식 사망한 성균관대 불어불문학과 학생 김귀정의 30주기 추모시집이다. 도서관 계단 시작 지점에 있는 김귀정의 추모비 곁을 지나간다. 어느 시인은 추모 중에 아직도 “우우 바람이 분다 / 화르르 꽃잎이 진다 / 너울너울 첫눈이 내린다”고 썼다. 5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