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로마에서는 로마인처럼 행동해라.” 등 로마와 관련된 서양 속담이 많다. 19세기 독일 법학자, 예링은 “로마는 세 번 세계를 통일했다”라고 했다. ‘무력’, ‘기독교’ 그리고 ‘법’을 통해 유럽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철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에 큰 기여를 했듯이, 로마인들은 법학에 그러한 공헌을 했다. 로마제국은 쇠퇴하면서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열되었고, 이탈리아 반도를 기반으로 한 서로마는 476년에 멸망했다. 현재 터키 이스탄불 지역에 중심을 두었던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옛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려고 6세기에 대규모 법전편찬을 지시했다. 당시 최고 법학자들이 황제의 명에 따라 과거 수백 년간의 로마법을 집대성한 결과가 ‘시민법 대전’이라고 불리는 법전이다. 하지만 이 법전의 완성은 로마의 부흥을 이끌지 못했고 로마법의 발전에도 기여하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렇게 잊혔던 시민법대전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11세기 후반에부활한다. 당시 유럽 전역은 각 지역마다 서로 다른 관습법에 따라 법적 규율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장거리 교역 확대와 상인들의 이동이 활발해지면서 지역별로 다른 관습법의 불편함과 변화한 사회환경에 뒤떨어진 관습법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이러한 문제점들에 해결책을 찾던 법학자들은 도서관 서고 먼지 속에 묻혀있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법전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볼로냐 지역에서 페포를 위시한 법학자들이 옛 법전에 현대적 해설을 덧붙인 강의를 하였다. 이들의 새로운 접근방식과 법해석 강의는 유럽 전역에 명성이 퍼졌고 멀리 북유럽에서까지 수많은 학생들이 강의를 듣기 위해 멀고 험한 길을 떠나 볼로냐에 모여들었다. 1100년경에 볼로냐는 “학문의 땅”이라고 불리기 시작했고, 이렇게 모여든 유학생들의 하숙집과 기숙시설이 유럽 최초의 대학인 볼로냐 대학을 탄생시켰다. 볼로냐 대학에서 로마법을 공부한 유학생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로마법을 가르치고 로마법을 자기 지역에 적용하는 법률가로 활동하면서 로마법은 유럽 대륙의 모든 법규범과 제도의 ‘공통 분모’가 되었다.

이렇게 유럽의 공통법이 된 로마법은 20세기에 한국법에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세기 중반에 일본은 유럽에 유학생을 보내 법제도를 수입했다. 이때 일본은 지금 독일의 전신인 당시 프러시아 제국의 법제도를 주로 수입했고, 이 중 일부를 조선 식민지에 1920년대부터 적용했다. 이런 연유로 한국은 ‘경국대전’이나 대한제국 법령과 같은 우리 고유 법률로부터 단절되고, 일본을 통해 강제로 이식된 독일법의 영향 아래 놓였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법의 주요 개념과 원칙은 가깝게는 일본과 독일, 멀리는 로마법까지 찾아보아야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한 대한민국은 해방 후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미국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미국법은 영국법에서 발전한 ‘영미법’의 일부로서 로마법의 영향을 받은 유럽 ‘대륙법’과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대륙법은 법학자들의 이론을 중심으로 발달한 법이라 체계적이고 정치하나 추상적인 면이 많다. 반면에 판사들이 실제 사건을 해결하며 나온 판결에서 발전한 판례법 중심의 영미법은 실용적인 특성이 강하다.

비록 한국인 스스로의 선택은 아니었지만, 지난 백년간 우리 사회는 대륙법과 영미법 모두를 수용하여 한국 특유의 법제도를 만들어냈다. 세계 양대 법제도를 모두 수용하여 한국의 법문화와 융합하여 독특한 ‘혼합적(하이브리드)’ 법제도를 발전시켰다. 코로나19 사태와 우리 사회의 여러 갈등 요인들이 상존하지만, 법률가들이 대륙법과 영미법의 장점을 창의적으로 활용하여 우리 사회를 보다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고 나아가 인류의 법문화 향상에도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일러스트 | 김지우 기자 webmaster@
김재원 교수
법학전문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