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손재원 기자 (magandsloth@skkuw.com)
사진 손재원 기자 magandsloth@
사진| 손재원 기자 magandsloth@

 

광주의 기억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공간에 기록된 역사는 우리 모두의 것 

지난 7일부터 광주 옛 전남도청 별관 2층에서 노먼 소프 기증자료 특별전(이하 노먼 소프 특별전)이 열렸다. 외신기자 노먼 소프가 2020년에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하 5·18 민주화 운동) 40주년을 기념하며 필름을 기증해 이뤄진 이번 전시에서 도청 진압작전 직후의 희생자 사진 등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1980년 5월을 겪은 공간은 41년이 지난 지금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지난 14일, 기자는 5·18 민주화운동 41주년을 앞둔 광주로 향했다. 

5월의 봄, 광주는 어떤 곳인가
 5·18 민주화 운동은 지난 18일로 41주년을 맞았다. 5·18 민주화운동이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열흘간 전두환 정권에 맞서 광주 등지에서 벌어졌던 민주화 항쟁을 말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 사후,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민들은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의 쿠데타에 반대하며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1980년 5월 17일까지 이어진 ‘서울의 봄’은 국내 민주주의의 확립을 위한 평화적 투쟁의 시기였다. 

민주화운동의 열기 속에서 광주도 이에 연대했다. 그러나 5월 17일 밤,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며 계엄군의 배치와 함께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진다. 이어 18일에 계엄군이 전남대 학생들의 등교를 저지한 것이 시위의 도화선이 됐다. 전남대 정문 앞에서 시작된 대학생들의 시위는 곧 광주 전역으로 확대됐으나 공수여단을 동원한 신군부의 무력 진압으로 결국 5월 27일 새벽, 항쟁은 막을 내렸다. 

광주의 기억을 다시 수면 위로 -
옛 전남도청 

노먼 소프 특별전이 열린 옛 전남도청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마지막까지 계엄군에게 저항했던 현장이다. <아시아 월스트리트 저널> 기자였던 노먼 소프는 5월 23일부터 27일까지 5·18 민주화운동의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특히 27일 아침에 촬영한 옛 전남도청의 현장 사진은 현재까지 발견된 자료 중 가장 앞선 시간대의 기록이다. 계엄군은 27일 새벽 시민군이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도청에 제3공수여단을 투입했다. 상무충정작전이라는 이름으로 4시 10분경 시작된 무력 진압은 수류탄을 동원해 진행됐으며 당시의 정확한 정황과 사망자 숫자는 현재까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이후 외신에 7시 반경, 국내 언론에는 9시 정도에 현장이 공개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진은 국내 언론에 공개되기 전 계엄군의 진압 직후 모습이 담겼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이번 전시를 통해 진압작전 직후 도청의 처참한 내부 모습, 도청 안의 희생자 9명과 도청 건너편 YMCA 앞 희생자 1명의 사진 등이 최초로 공개됐다. 시민군 대변인을 맡았던 윤상원 열사를 비롯해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문재학·안종필 열사 등의 모습이 담겼다. 김동수 열사의 경우 이 사진을 통해 사망 당시의 위치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해당 사진은 도청 복원 및 최후 사망 장소 파악 등의 작업에도 활용될 예정이다. 

또한 도청 사진 외에도 노먼 소프가 23일부터 광주에 머무르며 남긴 시민들과 계엄군의 모습이 함께 전시됐다. 특히 5월 26일 죽음을 무릅쓰고 계엄군 탱크를 막기 위해 금남로로 나선 '1980년 5월 26일 광주 농성동 죽음의 행진' 사진에는 계엄군과 대치한 시민들의 표정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행진 이후 시민 지도부의 최종 협상이 실패하며 결국 27일 새벽 계엄군의 도청 무력진압으로 이어졌다. 도청과 시가지 곳곳에 자리한 계엄군의 모습은 공식적으로 인정된 사망자만 165명에 달했던 광주의 처참한 현실을 암시한다. 

노먼 소프는 해당 필름의 기증 취지에서 “5·18 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향한 길고 긴 투쟁의 일부분이다”며 “앞 세대가 자유선거를 확립하고 민주주의를 꽃피우려고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지, 지금 젊은 세대가 배우고 진심으로 감사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오월의 흔적을 몸에 새기다 - 
전일빌딩245

전일빌딩245(이하 전일빌딩)는 광장을 사이에 두고 옛 전남도청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건물을 사격한 총탄 흔적 245개가 발견돼 지금의 이름이 붙었고 이후 공사를 거쳐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특히 집중 사격의 대상이 됐던 10층은 ‘19800518 전시관’으로 운영된다. 내부에는 백 개도 넘는 탄흔이 빼곡하게 남은 벽면의 기둥과 바닥이 그대로 보존됐다. 2020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하 국과수)은 추가 조사를 거쳐 전일빌딩의 탄흔 개수를 최종 270개로 인정했다. 

정영창 작가의 ‘검은 하늘 그날: 전일빌딩’은 이런 역사적 맥락을 담았다. 건물 위에 총탄 자국 및 발자국과 유사한 흔적을 그렸다. 전일빌딩에서 근무하는 임길택 해설사는 “보는 사람마다 감상이 다양할 것”이라며 “저 자국을 탱크의 바퀴 자국으로 볼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정 작가는 작가의 말에 “전일빌딩은 1980년 오월의 목격자이며 헬기총탄의 희생자이다”고 적었다. 

헬기에서 기관총으로 전일빌딩을 사격했다는 의혹은 1988년부터 꾸준히 제기돼 왔다. 그러나 △1995년 국방부·검찰의 합동 조사 △1996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재판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등에서 모두 증거 부족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2017년 당시 전일빌딩 내 전일방송 근무자들은 5·18 진실규명지원단과의 집단 인터뷰에서 7층부터 10층까지의 사격 흔적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같은 해 국과수 조사에서 탄흔이 퍼진 모양과 벽면의 파인 자국 등을 분석한 결과 헬기 사격의 가능성이 다시 힘을 얻었다. 2018년 국방부 5·18 특별위원회 역시 해당 조사 결과를 수용했다. 10층짜리 전일빌딩은 1980년의 광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임 해설사는 탄흔이 남은 자리마다 붙은 노란색 스티커를 가리키며 “아래에서 총을 쐈다면 절대로 이런 탄흔이 생길 수 없다”고 말했다. 전일빌딩 기둥이 헬기 사격의 증거로 꾸준히 언급되는 이유다. 전시관에는 당시의 광주 시가지를 재현한 조형물 위로 거대한 헬기 모형이 배치돼 있다. 

한편 전두환 전 대통령은 2017년 자신의 회고록에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밝힌 고(故) 조비오 신부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해 사자명예훼손죄로 기소된 바 있다. 지난해 말 1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고 항소해 지난 10일 광주 법원에서 항소심 첫 공판이 열렸다. 그러나 전두환 전 대통령이 불출석함에 따라 공판은 2주 연기됐다. 임 해설사는 기둥과 바닥의 탄흔을 짚어주며 “이곳의 역사가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길 바란다”고 전했다. 

시대와 세대를 아우르는 우리의 역사로 -
5·18 민주화운동기록관 


전일빌딩에서 금남로를 따라 올라가면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이하 기록관, 관장 정용화)이 있다. 2011년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물로 등재된 후 기록의 보존과 전시 등을 위해 설립된 공간이다. 현재는 유네스코 세계기록물 등재 10주년을 맞아 지난 12일부터 8월 5일까지 ‘기억의 지층, 기념의 미래’ 특별전시가 진행 중이다. 이곳에는 계엄군의 점령 상황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 등이 생생하게 담긴 시민들의 일기와 수배지, 당시 신문 등이 전시돼 있다. 또한 전남대 학생회장 박관현 열사의 묘지에서 발견된 태극기와 계엄군이 전남대병원을 사격하며 총알에 찢긴 의사 가운 역시 이번 특별전을 통해 처음 공개됐다. 기록관 측은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기록물들이 5·18 민주화 운동 당시의 아픔을 여과 없이 전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기록관 소속 김향순 해설사는 “공식적으로 인정된 첫 희생자는 평범한 30대 청각장애인 남성이었다”며 “광주 시민들이 처음부터 총을 든 건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계엄군의 계속되는 무력 진압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시민들도 무장하게 된 것이다. 당시의 폭력적인 상황은 시 외곽도로를 재현한 전시물에서 엿볼 수 있다. 계엄군의 무차별적인 사격에 의해 사망한 시민들의 신발이 도로 위에 놓여 있다. 김 해설사는 이에 대해 “광주의 소식을 알리려던 사람들, 계엄군을 피해 도망치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시신을 묻을 관을 구하려고 나갔다가 총탄에 맞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5월은 날이 무더워 시신이 금세 상할 수밖에 없었다. 기상청 지상관측자료에 따르면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간 광주의 평균 최고 기온은 26도 전후였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광주에서 폭력적인 소요 사태가 일어나고 있다고 전국적으로 선전했다. 서울 내 언론 역시 정권에서 내보낸 내용을 그대로 기사화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소식이 차단된 국내와 달리 해외 교포들은 힌츠페터 등 외신 기자들이 보도한 내용을 통해 광주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록관에는 서독과 미국, 일본 등지에서 교포들이 광주 상황을 알린 선언문이 남아 있다. 김 해설사는 “해외 교포들은 광주를 외면하지 않았으며 국내에서도 광주의 상황을 알았다면 분명히 연대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계엄군에 의해 광주가 고립된 동안에도 시민들은 직접 인쇄한 회보를 통해 현재 상황과 행동지침을 공유했다. 또한 자발적으로 부상자를 돌보고 헌혈에도 동참했다. 김 해설사는 당시 사용된 큰 양푼을 보여주며 “어머니들은 시장 바닥에 밥솥을 걸고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나눠줬다”고 설명했다. 현재도 광주에서는 나눔과 연대를 상징하는 주먹밥 나눔 행사가 매년 5월에 열린다.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올해 41주년을 맞이한 5·18 민주화운동 슬로건은 시민 공모로 채택된 ‘오월, 시대와 눈 맞추다, 세대와 발 맞추다’이다. 김 해설사는 “지금의 청년들에게 5·18 민주화운동은 까마득하게 먼 역사고 이를 직접 경험한 사람처럼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라면서도 “지나간 역사를 기억하고 되새기는 과정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도청 분수대 앞에는 5·18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모두 지켜본 시계탑이 단단히 서 있다. 시계탑은 군부 정권에 의해 강제 이전됐다가 지난 2015년 제자리를 찾았다. 현재는 매일 5시 18분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흘러나온다.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는 가사처럼 41년이 지나도 광주는 여전히 1980년 5월을 기억하고 있다. 김 해설사는 “5·18 민주화운동을 열흘간의 역사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며 “5월 18일 전부터 독재에 저항했고 신군부의 폭력에 의해 5월 27일에 일시적으로 멈췄을 뿐,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은 지속돼 왔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옛 전남도청 전경. 사진| 손재원 기자 magandsloth@
계엄군의 모습 및 시신 수습 과정. 촬영 노먼 소프, ⓒ문화체육관광부 옛전남도청복원추진단
전일빌딩 245 전경. 사진| 손재원 기자 magandsloth@
정영창 작가의 '검은 하늘 그날: 전일빌딩' 과 이혜경 작가의 '민주의 탄환'. 
사진| 손재원 기자 magandsloth@ 
시민이 기증한 태극기. ⓒ5·18 민주화운동기록관
창문을 관통한 탄흔. 사진| 손재원 기자 magandsloth@
기둥의 탄흔. 사진| 손재원 기자 magandsloth@
5·18 민주화광장에 자리한 시계탑. 사진| 손재원 기자 magandslo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