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익숙함과 낮섦 사이
어느덧 장마를 동반한 여름에 접어들었다. 매번 맞이하는 계절이지만, 참 낯설다. 꼭 챙겨보는 것이 뉴스 말미에 기상 예보가 되어버렸다. 뉴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포털에서도, 앱에서도 계속 확인한다. 몇 시 즈음 비가 온다네, 최고 기온은 몇 도라네, 미세먼지는 몇 ㎍/㎥이네. 이 예민함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을까? 그간 익숙했던 사계절과는 다르게 전지구적으로 나타나는 ‘기상이변’이라는 이름의 예측 불가능성 때문인걸까, 아니면 10분마다 갱신되는 날씨예보를 시시때때로 확인할 수 있게 된 과학기술의 발전 때문일까. 자연 현상에 대한 두려움을 과학기술로 극복했다고 하더라도, 급변하는 변화에 태연하기는 쉽지 않다. 그 이유가 낯선 자연 현상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한, 익숙해진 과학기술 때문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익숙하고도 낯선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누군가는 그간의 익숙함에 안주하지 않고 불편하지만 낯선 그 무언가를 위해 싸웠고, 또 그 누군가는 가장 안정적인 낯선 것을 익숙하게 만들었다. 전지구적으로 살림살이가 나아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익숙함과 낯섦 사이에서 불편함, 위협, 공포를 이유로 계층에서, 세대에서, 젠더에서 경계를 짓고 있다. 나쁘지 않다. 넘어야할 산이 많지만, 그 또한 변화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시대이다. 

“상상적 이해”와 대화
역사는 과거에 대한 분석과 연구로, 현재에 발딛고 있는 역사가와 과거 누군가에 의해 남겨진 기록 간의 대화로부터 시작된다. 과거의 기록들은 현재의 역사가들이 물어보는 대로 대답하지 않는다. E. H. 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현재의 역사가는 자신이 다루는 사람들의 마음 그리고 그들의 행위와 그 배후에 있는 생각을 “상상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Carr에 대한 많은 비판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상상적 이해(imaginative understanding)”가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여전히 현재 절대적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가치와 기준으로 과거인들을 일방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혹 과거인들의 유산에 대해, 현재로서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위대한 결과물, 그들의 비상함과 위대함에 감탄해 마지 않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그들이 지금과 다른 그 어떠한 필요성으로 이러한 결과물을 만들었는가이다. 현재 우리에게 없다고 그들에게도 없으란 법이 없으며, 현재 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이는 것이 그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의 절실함과 과거의 절실함은 다르다. 우리는 어느덧 현재의 익숙함과 절실함을 기준으로 과거를 재단하고, 우열을 매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 확장한다면 Carr의 ‘상상적 이해’는 현재에서 과거를 이해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되 다른 지역의, 다른 문화를 가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이해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그들의 절실함과 생활방식을 21세기 대한민국에 사는 내가 어찌 나의 방식대로 재단할 수 있으랴. 다양함에 대한 이해와 소통이 전제되지 않으면 시간을 달리해서 살아갔던 이들과, 같은 시간을 사는 다른 공간의 사람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또다른 우열과 폭력의 명분이 나도 모르게 스며들 수 있다. 
다만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지, 모든 것을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문화와 생활방식을 ‘이해하는’ 일은 경계를 넘어 간극을 좁히는 방법이지만, ‘동의’를 전제로 하지는 않는다. 모두 다 같을 수도 없고, 같을 필요도 없다. 우리의 대화법이 그래야하지 않을까. 가히 두려워할 만한 후생(後生)들에게 한 마디 건네본다.

 

일러스트 서여진 외부기자 web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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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화 교수 사학과
한영화 교수
사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