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긴 역사에서 인간이 서로 만나 소통하는 범위는 끊임없이 늘어왔다. 오래전 선사시대 선조들은 많아야 몇백명 정도의 사람과 가까이서 소통했다. 요즘 우리는 클릭 몇 번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과 소통한다. 이제 소통은 전 지구적 규모다. 더 넓은 연결로 소통도 늘었지만, 분열과 갈등도 함께 늘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기적 개인의 관점이 있다. 하지만 눈을 돌려 주변을 보라. 자신을 뺀 다른 모두와 투쟁하는 이는 현실에 없다. 오래전 여름휴가 때 들린 해변 가 상점은 휴가 온 외지인에게 높은 바가지요금으로 상품을 팔고는 했다. 하지만 가게 주인이 한 마을 사는 사촌에게도 같은 값을 불렀을 리 없다. 우리는 같은 집단에 속한 사람과는 공감, 유대, 협력을 앞세우고, 다른 집단 사람과는 쉽게 교감하지 못한다. 안락한 집단 내 이타성은 마음 불편한 집단 간 이기성과 공존한다. 공감에도 반경이 있고, 그 반경은 각자 스스로 설정한 경계가 정한다. 

물리학에서 이론을 적용할 때 먼저 경계를 설정한다. 경계 안 모든 것을 시스템(계, 系), 그 밖 모든 것은 환경이라 한다. 책상 위 노트북의 역학적 평형을 다룰 때 둘을 묶어 하나의 시스템이라 할 수도, 노트북만을 시스템으로 설정할 수도 있다. 내 맘이다. 구하고자 하는 답이 무엇인지에 따라, 그리고 답을 얻는 과정의 편의를 위해 안과 밖의 경계를 설정할 뿐이다. 경계는 물리학자 머릿속에만 있다. 자연에 경계는 없다. 

물리학 뿐 아니라 사람 사는 세상에도 객관적 경계는 없다. 일차원 직선이 눈앞에 있다. 직선을 둘로 나눠 왼쪽, 오른쪽이라 하려면 일단 점을 찍어 경계를 지어야 한다. 점 찍어 나누지 않으면 왼쪽과 오른쪽은 직선에 없다. 그나마 직선 위 점들은 영차원 점 하나로 둘로 가를 수 있지만, 이차원에서는 이마저도 불가능하다. 정사각형 왼쪽 위, 오른쪽 아래 꼭짓점에 파란색을 칠하고, 왼쪽 아래, 오른쪽 위에 빨간색을 칠하자. 한번 그려보라. 빨간색 두 점과 파란색 두 점을 색깔별로 묶어 딱 가를 수 있는 일차원 직선은 없다. 나를 설명하는 것을 모두 모아 나열해보자. 나이, 좋아하는 음악, 지금 읽고 있는 책, 길게 이어지는 목록이 된다. 이 목록을 가지고 한 사람의 상태를 엄청나게 높은 차원의 위상공간(phase space)안 한 점에 대응시킬 수 있다. 이렇게 상상한 고차원 위상공간에 놓인 많은 사람을 둘로 가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차원에서도 불가능하니 자명한 사실이다. 우리와 저들을 나누는 경계는 세상에 없다. 우리 각자 마음 속 상상일 뿐이다. 

누군가가 우리와 달라 보인다 해서 그 사이에 두터운 분리의 벽이 실재한다고 믿는 것은 망상이다. 눈을 뜨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모두를 바라보면 깨닫는 것이 있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다른 것보다 같은 것이 훨씬 더 많다. 다름이 아닌 같음을 보려는 노력으로 경계는 외부로 확장되고 공감의 반경도 늘어난다. 수많은 같음을 무시하고 사소한 작은 다름에 주목해 그은 분리의 경계에서 차별이 싹튼다.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를 아우르는 공감의 반경을 상상한다. 그 안에서 어느 누구도 다르다고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꿈꾼다. 티끌처럼 작은 행성을 함께 공유하는 우리 모두의 책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