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인간의 성장을 개구리의 삶에 비유한다면, 우리가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올챙이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이 될 때, 대학생에서 취업 준비생이 되고 신입 사원이 되는 순간 말이다. 그런데 힘들게 개구리가 되었는데 올챙이로 돌아가게 되는 것은 너무 급격한 변화였을까? 올챙이로 돌아갈 때 우리는 마치 넓디넓은 우주에 혼자 던져진 기분을 느낀다. 아무것도 아는 게 없고, 아무도 모르는데, 그런 곳에 적응해서 다시 개구리가 되어야 한다니. 절망적일 만하다.

그런데 ‘우물 안 개구리’라는 표현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이는 ‘세상의 넓은 형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에, 부정적인 생각이 떠올랐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이를 타내는 ‘정저지와(井底之蛙)’, ‘감중지와(坎中之蛙)’, ‘감정지와(坎井之蛙)’ 등 많은 고사성어가 있기까지 하다. 나도 새로운 집단에 속하게 됐을 때 ‘내가 정말 우물 안의 개구리였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고, 이 표현을 많이 썼다. 하지만 이 표현은 개구리에게 상당히 실례가 되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개구리에게 우물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이자 벗어날 수 없는 전부이다. 알에서 갓 깨어난 올챙이에서 지금의 개구리가 된 것이다. 이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그만큼 잘 적응했다는 의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속하게 되는 우물에서 적응하고 많은 것을 배우고 잘 해내야 개구리가 될 수 있다. 학교에서는 잘 적응해야 졸업을 할 수 있고, 회사에서는 업무들을 잘 처리해내야 승진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때론 잘못을 해서 혼날 때도 있지만, 그 뒤에는 교훈을 얻기도 한다. 그러면서 개구리가 돼 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개구리는 그야말로 ‘적응의 끝판왕’인 셈이다. 그런데 세상의 넓은 형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감히 위대한 개구리에게 비유하다니. 개구리는 우물이라는 세상의 넓은 형편을 깨닫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해 가면서 개구리가 된 것인데 말이다. 개구리가 이 사실을 알면 억울해서 우물 밖으로 펄쩍 뛰쳐나올 것만 같다.

헌내기인 나 또한 아직은 올챙이다. 하지만 졸업이 가까워질 때쯤엔 나도 개구리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동안 나는 개구리가 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을 것이다. 개구리가 된다면 뿌듯하겠지만, 다시 올챙이가 되어야 한다는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올챙이로 돌아가겠다. 내 발로 우물로 뛰어들겠다. 올챙이로 돌아가서 개구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겠다. 마지막으로 개구리에게 그동안 개구리의 노력을 모르고 무시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다. 오늘따라 개구리가 존경스럽다.
 

강효성(경영 20)
강효성(경영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