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황여준 기자 (yjyj0120@skkuw.com)

인터뷰 - 최영관 박사

가족 위해 헌법재판소로 과감히 이직해
먼 목표보다는 단기적인 과제를 확실히

 

Mnet 음악 경연 프로그램 ‘너의 목소리가 보여’ 출연진은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는 스튜디오 천장을 찌를 듯 뻗어 나갔다. ‘신바람 최박사’는 그렇게 유튜브 스타로 등극했다. 엉거주춤한 자세에 가려졌던 그의 정체는 한국수자원공사의 직원이자 5개의 기술사 자격증을 취득한 최영관 박사였다. 그는 현재 헌법재판소 청사관리과에서 근무한다. 공부와 노래 모두를 놓지 않는 그의 인생관을 들어 봤다.

그동안의 이력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우리 학교 전기전자 및 컴퓨터공학부를 졸업해 석사, 박사 과정까지 마쳤어요. 한국수자원공사(이하 수자원공사)에 입사한 후 시설 관리 업무에서 시작해 설계·연구·해외사업 부서를 거치며 13년가량 근무했죠. 수자원공사에 근무하면서 △건축전기설비기술사 △발송배전기술사 △소방기술사를 비롯해 5개 기술사 자격증을 취득했어요. 2016년에 헌법재판소로 이직해 현재까지 청사관리 업무를 총괄하는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어요. 헌법재판소에 이직한 이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했어요.

본업은 헌법재판소에서 일하는 공무원이지만, 공무원 경력경쟁시험 면접위원, 정부 기관 사업의 자문 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죠. 공부하고 일하면서도 밴드 활동에 참여하고, 음악 방송에도 출연하는 등 정말 다양한 일이 있었던 것 같네요. 최근에는 제가 그동안 공부하면서 익힌 요령을 담은 책을 출간하기도 했어요.
 

헌법재판소로 이직한 이유가 궁금하다.
취업, 자격증 시험 관련 여러 공고를 보다가 우연히 헌법재판소에서 낸 공고를 발견했어요. 근무지와 가족만을 생각하면서 망설임 없이 이직을 결정했죠. 수자원공사 특성상 근무지 이동이 잦아 가족과의 시간이 줄어들었거든요. 사실 수자원공사가 제 전공 분야를 살리기에는 더 적합해요. 수자원공사에서는 신재생에너지 관련 연구를 많이 했어요. 헌법재판소에 온 이후로는 관련 분야에서는 많이 멀어졌죠. 그래서 헌법재판소에 온 이후로 왜 자격증과 전공을 살리지 않느냐는 질문을 참 많이 받아요.

제 커리어는 고민거리에 없었던 것 같아요. 어느 곳에서든 커리어는 스스로 만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해요. 헌법재판소에 온 이후로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새로운 목표를 갖고 즐겁게 생활하고 있어요. 헌법재판소 업무 외에도 여러 곳에서 전문 역량을 계속 발휘하고 있어요. 전기·소방·신재생에너지 분야의 기술 기준 제·개정에 참여하거나, 해외 건설사업의 기술심의 등을 맡기도 하죠.

헌법재판소에서 하는 일을 소개해달라.
헌법재판소에서는 제 전공 분야를 넘어서 청사 관리 업무 전반에 대해 보고를 받고, 판단을 내리는 중간관리자 역할을 하고 있죠. 새로운 건물을 짓거나, 헌법재판소 청사시설을 관리하는 업무를 총괄하는 거예요. 제가 잘 아는 전기 관련 사안뿐만 아니라 건축, 기계, 통신, 조경 등 다양한 분야와 관련한 보고를 들어요. 처음에는 그런 분야 하나하나를 자세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업무에 적응하다 보니 세부 사항을 모두 이해할 필요는 없겠더라고요. 사업을 총괄하는 자리에서는 핵심을 이해하고, 방향성을 정하는 역할을 해야 해요. 상급자에게 전문적인 내용을 알기 쉽게 보고하는 능력도 필요하죠.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당시 방송을 안정적으로 송출하는 일도 했어요. 수많은 언론사 장비에 전기를 연결하고, 전기 설비를 계속해서 점검했죠. 

20대 때 어떤 진로를 구상하며, 어떤 삶을 살았는가.
대학에 들어왔을 때는 제가 헌법재판소에서 일할 것이라고 상상도 못 했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멀리 있는 목적지를 정해두고 나아가는 편은 아닌 것 같아요. 20대 시절부터 지금까지 당면한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그 과정에서 새롭게 제시되는 여러 기회를 잡아 왔죠.

군대에 입대하기 전 20대 시절은 일생에 걸쳐 가장 열심히 놀았던 시기예요. 한 번은 마음을 다잡고 공부하기 위해 친구들과 스터디 모임을 만들었어요. 다 같이 돈을 모아 원룸을 계약하고, 그 안에 모여서 공부하기로 했어요. 결과적으로 원룸은 저희의 놀이터가 됐던 기억이 나네요. 후회가 없을 만큼 놀았던 것 같아요. 제대 이후에는 그동안 낮아졌던 학점을 만회하고 취업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죠.
제게 있어 20대는 ‘내 평생 가장 자유로웠던 시절’이에요. 미완의 시기지만, 24시간을 온전히 나만을 위해 쓸 수 있던 유일한 때였죠. 공부하고, 놀고, 연애하고, 알바하면서 그 당시에 즐길 수 있었던 걸 즐겼어요

기술사 자격증을 5개나 취득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입사하기 전에는 기술사 자격증을 공부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어요. 현장에 뛰어드니 이론과 현장 실무의 차이가 생각보다 심하더라고요.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이었죠. 더 공부해서 직장에서 인정받고 싶다는 동기에서 공부를 시작했어요.

칭찬이나 보상을 이용해서 행동을 유도하는 ‘수동적인 힘’을 원동력으로 삼았어요. 여러 기술사 자격증을 따게 만든 힘이죠. 공부하면서 끊임없이 ‘자격증을 취득한 제 모습’을 상상했어요. 회사에서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부서로 발령을 받거나, 연구 업무를 담당하거나, 심의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떠올렸죠. 자격을 갖추기 전과 후로 제 활동 반경이 달라질 것이라고 굳게 믿었어요. 실제로 자격증과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로 회사에서 맡게 된 일이 달라졌어요. 입사한 당시에는 여러 지사에서 시설 및 공사관리 업무를 주로 맡았어요. 열심히 공부해 일정한 자격을 갖춘 뒤로는 본사에 있는 설계처, 연구원, 해외기술센터처럼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 부처에서 근무했죠. 월급이 인상되거나 더 가파른 승진을 보장해주진 않았어요. 그렇지만 중요한 부서에서 일할 때 자연스럽게 경력과 실력이 다져지죠.

회사에 다니면서 기술사 자격증을 준비한 비결은.
대학교 친구들은 저를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기억하지 않을 거예요. 제대 이후 열심히 공부했을 때도 결코 최상위권 학생은 아니었어요. 한 번도 제가 공부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오히려 공부를 못한다는 열등감이 있었죠. 기술사 자격증은 합격률이 2~3%밖에 안 되는 만큼 취득하기 어려워요. 제가 그런 여러 자격증을 취득한 건 요령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가장 처음 취득한 기술사 자격증은 발송배전기술사였어요. 제 전공과 직접 관련한 자격증이었죠. 그런데도 처음 기술사를 따는 데 3년이나 걸렸어요. 처음부터 시험이 쉽지는 않았죠.

처음 기술사 자격을 얻고 나니 그다음 시험부터는 훨씬 수월했던 것 같아요. 소방기술사에는 크게 네 가지 영역이 있어요. 그중 하나는 전기기술사에서 공부한 내용과 중복되는 게 많아요. 다른 사람보다 공부할 양이 4분에 1은 적은 셈이었죠. 공부를 많이 하다 보면 서로 다른 전문 분야끼리도 통하는 내용이 많더라고요. 그렇게 효율적으로 공부하니까 나머지 4가지 자격증을 모두 취득하는 데는 약 2년 정도 걸렸어요.

업무 외 시간에는 공부를 마음속에서 최대한 우선순위로 뒀어요. 회사에 다니면서 자격증을 딴 가장 중요한 요령 같아요. 꼭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면 바쁜 일정에도 공부할 시간이 생기거든요. 시간 관리처럼 흔히 중요하게 여겨지는 요령은 그다음 문제라고 생각해요. 어쩔 수 없는 일정으로 계획을 못 지켰다고 해서 스트레스받지 말라는 말도 하고 싶어요. 저도 야근이나 회식으로 공부를 못하게 되는 일이 많았거든요. 다만 주말은 무조건 사수하는 게 핵심이에요.

언제부터 노래를 즐겨왔는가.
대학생 때부터 노래를 좋아했어요. 처음 노래방에 갔을 때는 다들 저처럼 부르는 줄 알았는데, 제가 소질이 있는 편이더라고요. 이후 자과캠에 속한 헤비메탈 밴드 ‘화려한 혈통’에서 보컬로 활동했어요. 수자원공사에 입사하고 헌법재판소로 이직하면서도 밴드 활동은 꾸준히 유지하고 있어요. 수자원공사 사내 밴드와 함께 KBS ‘근로자가요제’에 출연해 수상하기도 했죠. 꾸준히 밴드 활동을 하다 보니 ‘너의 목소리가 보여’ 같은 방송에도 출연할 기회가 왔어요. 방송이란 게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게 된 신선한 경험이었어요.

20대 이후로 음악을 멈춘 적이 없네요. 어느덧 제 생활의 일부가 된 것 같아요. 늘 노래 영상을 찍어서 보관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회사 일과 공부에 밀려 시도할 틈이 없었죠. ‘너의 목소리가 보여’에 출연한 이후로 기대 이상의 사랑을 받았고, 거기에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조만간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더 많은 분과 노래를 통해 소통하고 싶어요.

살면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는지.
최우선 목표는 당연히 가족과의 행복한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겠죠. 그 밖의 목표는 크게 직업과 취미 두 방향으로 나뉘어요. 직업적으로는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러려면 우선 주어진 자리에서 제 역할을 잘 해내야겠죠. 나아가 제가 쌓은 경험과 기술력, 자격을 더 많은 곳에서 발휘하려고 해요. 최근에는 책을 출간했는데, 누군가가 저를 보고 삶에 원동력을 얻는다면 그 역시 영광일 것 같아요.

취미에 있어서 목표는 제 이름으로 된 음원을 발매하는 것이에요. 평생 노래를 취미로 삼으면서 100회 이상 공연 무대에 오르고, TV 출연까지 하니까 음원 발매에 더 욕심이 나네요. 직장인 밴드에서 좀 더 큰 공연에 올라갈 수 있게끔 자작곡을 만드는 등 여러 준비를 하고 있어요. 아무리 기존에 발매된 노래를 잘 불러도 자작곡이 없이는 큰 무대에 오르기 힘들더라고요. 이 목표 역시 차근차근 이뤄나갈 생각이에요

다채로운 인생을 살아온 입장에서 20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말씀드렸다시피 20대 때는 눈앞에 놓인 과제만 보면서 살았어요. 중간고사를 치르면 기말고사가 있었고, 학부를 졸업하고는 자격증 시험을 치러야 했죠. 저도 늘 눈앞의 목표를 이루면서 사는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20대 이후에는 무엇을 할지, 취업 이후에는 어떤 커리어를 쌓을지는 생각해보지 못했어요. 제게는 너무 먼 얘기로 느껴졌죠.

작은 목표를 이뤄야 시야가 넓어지고 미래도 더 잘 내다볼 수 있어요. 너무 멀리만 보고 가는 방식은 동기부여도 잘 안 되고 쉽게 지치죠. 큰 목표가 있어도 일단 어떤 길에 들어섰다면, 그 길 위에 있는 작은 과제들을 새로운 목표로 삼고 나아가도 좋은 태도라고 생각해요. 저도 그렇게 단기적인 목표를 확실하게 이루면서 살아왔어요. 목표에 깃발을 꽂고 가다 보면 멈출 때도 있고, 길을 잘못 들 때도 있어요. 하지만 결국은 그 지점에 도달하게 되죠. 작은 목표를 계단 삼아 큰 꿈에 도달하길 바라요.

ⓒ김가현 기자 dreamer7@
최영관 박사.
사진|김가현 기자 dreamer7@

 

ⓒ최영관 박사 제공
'화려한 혈통' 무대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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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관 박사 제공사무실에서 일하는 모습.
직장인 밴드 공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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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관 박사 제공『반드시 합격하는 공부법은 따로 있다』 표지.
『반드시 합격하는 공부법은 따로 있다』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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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득 자격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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