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박명호 편집장 (freshnblue@skku.edu)

첫 번째 사례. 얼마 전 현대중공업의 한 하청노동자가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철폐를 주장하면서 분신 자살했다.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당하는 수모와 차별에 대해 유서를 쓰고서는 자신을 비롯한 동료들이 처해 있는 현실을 알리고자 자살을 택한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그의 작은 바람은 그저 단순한 자살 사건 기사로 묻혀버렸다.

실제로 지난해 많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현실을 고발하고자 자살을 택했다. 이런 방법을 써서라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리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절박함의 표출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자살을 결행하기까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바다. 그 결과 그들이 처해 있던 현실에 대해서 일반 사람들은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질 수 있었고, 구석에 남아있던 알량한 사회의식은 그들의 조건을 개선하라는 요구에 무심할 수 없게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이들의 뇌리에서 노동조건 개선을 외치던 목소리는 잊혀져갔다.

두 번째 사례. 지하철역에서 전동차가 들어오는 순간 선로를 향해 몸을 던지는 사람들이 어느 순간 늘어나기 시작했다. 텔레비전 뉴스에 나오는 지하철역 CCTV 화면을 보면, 그들은 각자의 사연을 가진 채 선로로 뛰어드는데, 주위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고 그 자리에서 도망치려하고, 기자의 입에서는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만이 나온다. 그리고는 그저 지하철에 뛰어드는 사람들 때문에 지하철 타기가 겁난다, 죄 없는 기관사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는 말만이 난무할 뿐 무엇이 이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는가에 대해서는 무신경한 모습이다. 그만큼 자살이 일반 사람들에게 가까이 혹은 익숙하게 다가왔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건 기자의 지나친 비약일까.

위에서 말한 비정규직 노동자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라면 다는 바꿀 수 없더라도 2, 30%만이라도 바꿔진다면 그걸로 만족하고 자신의 죽음으로 조금이나마 개혁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죽기 전에 했다고 한다. 이 사례를 모든 자살에 적용할 수는 없지만 자살이라는 것은 자신이 부대낀 현실에 대한 최후의 소극적 저항이라는 결론 역시 억지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자살’이라는 한 이미지의 살포 속에 죽은 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묻혀져 버리고, 또다시 어떤 이는 같은 이유로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어느 순간 대중은 거기에 익숙해질지 모른다. 죽음에 익숙해진 사회가 과연 정상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