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박명호 편집장 (freshnblue@skku.edu)

아주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고전소설인 ‘흥부전’은 착한 동생과 악질적인 형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작가는 물론 소설에서 착하게 살았던 동생 흥부를 긍정적인 인물로 묘사하고자 했을 것이며, 실제로 어릴 적부터 이 소설을 읽은 수많은 독자들은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혹자들은 종래 이어져오던 이러한 인식을 뒤집어 보고자 했다. 비록 재산을 독차지하긴 했지만 놀부가 그만큼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해 명민하게 대처했기 때문에 나름의 결과가 돌아가지 않았는가, 또 흥부 역시 한 푼도 건지지 못한 게 자신의 무능력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었나 하는 해석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은 자신의 입맛대로 의도적으로 인물을 윤색한 면이 강하기에 이후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해석은 많은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데, 그것은 더 이상 현대 사회가 착한 사람은 대접받지 못하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당신은 절대로 남에게 허점을 보여서는 안 된다. 타인에게 보여준 허점은 그 사람과 관계를 지속하는 동안 계속 발목을 잡을 것이다. 그리고 착하게 산다는 것은 그것이 당신의 사회생활에 있어서 치명적 허점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당신이 선한 사람으로 각인될 때, 타인의 눈에는 ‘이용해 먹기 좋은 만만한 인간’이라는 인상으로 보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 그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 그 사람을 만나는 데 있어서 이해득실을 치밀하게 따진다. 그렇기에 당신을 어떻게 이용하면 자신에게 득이 될 수 있을 것인지를 계산한 후, 당신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변화를 가할 것이다. 다시 말해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존중하는 척하거나 깔아뭉개는 식으로 당신을 대할 것이다.

물론 착하게 보였을 경우에는 썩 좋은 대우를 받을 생각을 버리는 것이 좋을 게다. 이 사회에서 ‘당신은 착한 사람입니다’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나를 날로 잡아먹어도 나는 아무 말도 못합니다’라는 광고를 내는 것과 같은 의미가 돼 버린 탓이다. 어차피 처음부터 끝까지 경쟁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만당하는 것은 바보들의 몫이니 말이다(바보라는 것은 계산에 빠르지 못하다는 뜻이 아니었던가).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이미 선한 사람이라고 소문이 난 당신을 이용하려 들 것이고, 그 동안 자기 자신을 돌보지 못해 손해를 보는 쪽은 ‘선’한 당신일 뿐이다. 현대 사회에서‘된 사람’이니 하는 말들은 도덕책에서나 가치를 가질 사어(死語)에 불과하며, 그저 당신이 많은 손해를 보고 살았다는 징표와 다르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에 어울리고 적합한 인간형은 ‘난 사람’이지 ‘된 사람’이 아니다. 착한 당신이 살아남고자 아무리 안간힘을 써서 발버둥쳐도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헛일이다. 그렇다면 체제에서 안주한 채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뒤집어엎기 위해 ― 적어도 뒤틀린 인간형을 바로잡기 위해 ― 나설 것인가?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