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지난 3월 8일은 97번째 맞는 세계여성의 날이었다. 3월 8일이 세계여성의 날로 기념되는 이유는 1908년 3월 8일 미국뉴욕의 루트거스 광장에 집결한 섬유산업 여성노동자 1만¸500여명이 여성의 참정권를 요구하며 대대적인 시위를 벌인데 기원을 두고 있다. 2년 뒤인 1910년부터 지켜져 온 이 날은 1975년 유엔이 국제적인 기념일로 선포하였다. 따라서 세계 각 국은 이날을 기념하여 갖가지 행사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지난 2월 22일에 이날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 달라는 내용의 청원이 제출되었다고 한다. 한국 여성계의 입장에서 보면 지난 2004년은 진정 여성의 해였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큼직한 결실이 많았던 해였다. 성매매 특별법의 시행과 호주제 폐지 결의 및 개정민법의 국회통과가 그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서도 전국 각지에서 이번 여성의 날 을 맞이하여 기념축제와 문화행사가 매우 풍성하였다.

그러나 장구한 인류문명에 있어서 여성이 사회의 주체적 구성원으로 인지되기 시작한 시점은 그리 오래지 않다. 예를 들면 미국은 1920년이 되어서야 여성에 대한 보통선거권을 인정했고 영국이 1928년, 프랑스가 1945년이 되어서야 여성에 대한 참정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즉 여성은 세계의 절반을 차지하는 주체적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사회문제에 대한 최소한의 발언권인 참정권을 인정 받은지 불과 100년이 되지 않는다.

오랜 역사를 통해서 여성은 감추어진 존재였고 생식과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한 도구였으며 남성의 전유물로만 존재해왔다. 즉 여성은 일상적 삶의 주체로 인정받지 못했다. 따라서 자기 삶의 조건을 스스로 표현할 수 있는 자기 언어를 가지지 못했다. 여성은 항상 타자를 통해서 표현되어 왔고 타자와의 관계는 언제나 종속적인 권력관계였다. 물론 그러한 권력관계는 억압적 지식과 담론에 의해 언제나 자연적인 것으로 위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푸코의 말처럼 지식-담론권력은 저항을 스스로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저항에 의해서 균열되고 그 찢어진 틈새로 새로운 지식과 담론이 생산될 수밖에 없는 법이다. 실천적 페미니스트들은 지식-담론권력이 생물학적인 여성을 사회적 여성성을 갖춘 존재로 훈육하며, 감시와 처벌을 통해서 가부장적 지배세력으로서의 남성이 바라보는 시선을 여성성이라는 이름 하에 여성의 신체에 각인해 왔는지를 인식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페미니즘 운동은 내용면에서나 운동론적 방법론의 측면에서 획기적으로 성숙하였고 새로운 지평을 여는 열쇠를 확보하게 되었다. 결국 새로운 인식론에 대한 개방적 수용태도가 페미니즘 운동의 근본적인 동력이 아니었나 싶다.

이제 여성운동은 20세기의 가장 성공적인 사회운동의 한 전형이 되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2005년의 한국사회는 통일문제와 북핵문제, 분배와 성장의 문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그리고 비정규직 문제 등 어느 것도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채 혼미를 거듭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면서 한국의 시민사회 구성원들은 여성운동의 방법론에서,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의 일관성을 유지하게 한 지식과 담론의 생산방법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