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이경미 기자 (icechoux@skku.edu)

대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비판은 심정적으로 종결당했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비판이란 모든 비판의 전제이다. 비자본주의적 비판의 기저는 이것이다:사람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났나?자본주의는 이 세계의 일반 이론이요, 이 세계의 백과사전적 개요이며, 이 세계의 논리학이요, 이 세계의 열광이요, 이 세계의 장엄한 보충이요, 이 세계의 일반적 위안 근거이자 정당화 근거이다.

본주의는 세계를 마치 아지랑이 건너편의 들녘처럼 어그러져 보이게 하는 기괴한 재주를 가졌다. 인간이 인간이 아닌 것처럼, 고객은 왕이지만 고객이 아닌 인간은 무시해도 좋은 것처럼. 또한 더욱 일반적으로, 인간의 꿈과 현실을 분리하는 것 역시 교활한 자본주의의 기교다. 소위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자아실현의 욕구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인간적 존엄성은 그러한 지향을 통해 획득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합리적 이성과 자아실현의 욕구, 즉 꿈 사이에 또 한번 잿빛 아지랑이를 피운다. 어린 시절, 일괄적으로 학교에 제출하던 장래희망을 기억하시는지. 대통령, 사업가, 변호사, 작갉그 휘황찬란한 어휘의 장막을 걷어 볼 일이다. 그 속에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권력욕, 사업가로 대표되는 물욕이 도사리고 있지는 않은가. 아마도 그것이 처음부터 우리 꿈의 본질은 아니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누구를 변호하는 변호사가 되는가, 무엇을 노래하는 작가가 되는가이다. 인간의 생존은 인간의 존엄성을 전제로 하지 않으나, 인간의 존엄성의 실현은 대부분의 경우 생존을 전제로 한다. 자본주의는 “오직 돈만이 너희의 생존과 존엄을 보호하리라”고 선언한다. 대의와 명분은 사라지고 상황적 맥락만이 합리적인 현실로서 우리 앞에 우뚝 선다. 이 순간, 순수하던 꿈은 자본주의에 의해 해체되고 그 스스로 자본주의화 한다.

은 임금과 더 큰 권력과 명예, 우리가 꿈이라 착각하고 있는 세속적 목표들은 그를 통해 달성하고자 했던 본래의 인간적 삶과 행위에 대한 갈망이 사라진 순간, 이 시대를 지배하는 극악한 종교인 자본주의의 파편에 다름 아니다.자본주의를 옹호하면서 돈 없는 자들의 인간적 존엄성을 무엇으로 정당화 할 수 있는가. 진정한 휴머니즘은 돈과 밥에 의해 인간들의 꿈이 좌절하도록 그냥 두지 않는 것이다. 중세시대에, 기독교는 이미 단순한 신앙의 차원을 넘어섰다. 기독교적 세계관에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에게 갈릴레이 따위는 체제의 이단아로 치부해도 좋을 하나의 인간일 뿐이었지만 결국 근대는 인본주의의 혁명으로 시작된다. 현대사람들에게 파리 꼬뮌은 이상이지만 프랑스 혁명은 역사다. 이러한 모순은 자본주의의 착시현상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