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박형진 편집장 (rioter@skku.edu)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는 “우리 세계는 역사라는 병을 앓고 있다” 고 말했다.
이것은 즉 과거의 기억이 인간으로 하여금 후회와 양심의 가책에 빠지게 해 미래를 향한 도전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무기력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한 말이다. 때문에 니체는 과거와 그것이 불러오는 죄의식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곤 했다. 하지만 역사와 과거가 미래의 발목을 잡는 것이고 때문에 거추장스럽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지난 달 29일, 경술국치일을 맞아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는 기자회견을 열고 친일인명사전에 실을 1차 대상 3천 90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우리가 흔히 아는 사람들도 있었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 선정돼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 논란과 놀라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온 관련보도와 사회각계 반응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정말 ‘제대로 되기를 꿈꾸는’ 사회에 살고 있는지 의구심을 품게 한다.

일신의 안일과 부귀를 위해 국가와 민족에 반한 행위를 한 사람들의 이름을 밝히는 작업은 그 처벌여부를 떠나서 역사를 기록하고 평가하는데 기본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번 명단 발표는 1949년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권하에서 와해된 이후 56년 만에 다시 찾아온 역사바로잡기의 기회라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언론에서는 인명사전의 사소한 실수를 크게 부각시키고 몇몇 논란이 되는 사람들을 이용해 이번 발표 자체의 의미를 희석시키려 하고 있다. 사회각계의 반응도 마찬가지다. 명단에 포함돼 있는 인물의 유족들은 이미 줄 소송을 준비 중이고 심지어 제 1 야당의 대표자는 “훗날 이 작업이 평가 받을 날이 있을 것” 이라며 보복성(?) 발언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후 그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오히려 지배당했다는 사실에 분개하고 한탄한다. 그래서 프랑스나 독일 등의 예를 항시 사용하며 친일잔재 청산을 주장한다. 이는 많은 사람이 지금까지 요구했던 것이고 역사적으로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안타깝기까지 하다.

이번 친일명단의 발표는 지난 60년대의 반민특위처럼 친일잔재 ‘처벌’이 목적이 아니다. 단지 객관적 자료 조사를 통해 어려운 시기에 국가와 민족에 등을 돌린 사람들의 명단을 기록해 역사적으로 보존하고 이를 통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자는 것이다.

때문에 당사자나 관계자는 이번 명단발표 결과에 대해 항의하고 명단의 의의를 깎아내리는데 급급하기 전에 겸허히 받아들이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미 당사자들이 현재를 살아가고 있지 않은 현실에서 그 후손들마저 잘못된 당시의 행위를 반복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역사가 니체가 말한 그것처럼 병(病)이 되어 우리의 앞날을 흐리고 가로 막는 비극은 더 이상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