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 (철학과 교수)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우리의 과학적 지식이 칠면조의 신념과 같은 위치에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면 과학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들은 아마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특히 과학에 대해 굳은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무슨 정신 나간 소리냐고 할지 모른다.

우리는 과학적 지식이 입증된 지식이라고 믿고 있다. 과학 이론은 어디까지나 사실에 기초해 있고, 관찰과 실험을 통해 자료를 수집하여 이끌어 낸 것이기 때문이다. 관찰과 실험을 과학적 지식의 기초로 삼는다는 점에서 과학은 유사과학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과학을 뒷받침해준 것이 바로 귀납적 방법이었다.

귀납적 방법은 개별적인 관찰을 누적시켜 일반적인 법칙이나 이론을 도출해내는 방법이다. 예컨대, 성균관대 김모군은 머리가 뛰어나다. 성균관대 박모군은 머리가 뛰어나다. 성균관대 이모군은 머리가 뛰어나다는 관찰을 누적시켜, 성균관대 모든 학생은 머리가 뛰어나다는 일반적인 주장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물론 이때 관찰의 사례는 많고 다양해야 할 것이다. 과학자가 행하는 관찰이나 실험은 이보다 더욱 복잡하고 정교하겠지만, 단순화시켜 보면 같은 논리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버트란트 러셀은 귀납의 방법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칠면조 농장에서 자라게 된 한 칠면조는 아침 9시에 모이를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칠면조는 이 사실을 여러 차례에 걸쳐 확인했다. 매일 그는 하나하나의 관찰을 더해 나갔다. 드디어 그는 충분히 많은 자료가 모였다는 판단아래 ‘나는 항상 아침 9시에 모이를 먹는다’는 귀납추리의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 결론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목이 잘림으로서 부정할 수 없는 거짓으로 판명되고 말았다.

이 이야기가 함축하는 것은 우리가 개별적인 사례를 아무리 많이 누적시켜 일반적인 법칙을 도출한다 해도 그것은 정당화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논리적으로 정당화되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귀납의 결론은 언제나 관찰 사례의 누적인 전제가 말하는 것 이상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귀납적 방법은 다음과 같은 귀납의 원리가 정당화될 때만 올바른 방법이 된다. < 많은 수의 a가 다양한 조건의 변화 아래서 관찰되었고, 그리고 관찰된 a가 예외 없이 모두 b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면, 모든 a는 b라는 성질을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반성해 보아도 이 귀납의 원리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은 곧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원리가 정당화되지 못한다면, 과학적 지식은 칠면조의 신념과 다를 것이 없게 된다.

귀납적 방법에 문제가 있다면 다른 신뢰할만한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반증주의의 가설연역적 방법이나 패러다임 방법론은 이렇게 해서 새로운 과학적  방법론으로 제안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들도 모두 문제를 갖고 있다. 아직 믿을 만한 확실한 방법이 없다면, 과학적 지식에 대한 평가를 새롭게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의 지식은 어쩌면 약간의 근거를 가진 추측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세계는 실제 세계와는 다른 우리 나름대로 해석한 세계일수도 있다.

이런 이야기는 과학을 과소평가하자는 것이 아니다. 과학은 많은 것을 설명해 주며 무지의 세계에 빛을 던져준다. 우리는 과학 덕분에 인간답게 살게 되었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이 우리가 믿고 있는 것만큼 절대적이 아니라는 것을 과학철학은 과학에 대한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의 성찰을 통해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