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강준영 기자 (hispider@skku.edu)

   
고등학교 때부터 기자를 잘 따르던 친구 녀석이 있었다.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우리는 점점 이야기할 시간이 많아졌고, 그때부터 불길한 예감은 시작됐다. “자기야~보고싶어♡”라는 그의 문자가 핸드폰 액정에 떴을 때 불안은 폭발했다. 여느 사람이면 가볍게 넘길 수 있었으나 이 친구의 평소 행동은 ‘설마 이친구가 나를..’이라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그는 기자와 언제나 같이 있길 원했다. 다수의 아성에 이미 편입돼 버린 기자에게 이런 친구의 지나친 애정행각은 거부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동성애자는 이성애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성애자는 동성애자의 마인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한마디로 코드가 안 맞는 것이다. 홍석천이 다가와 포옹을 하며 볼에 입을 맞추면 우리는 불안해 할 것이다. 마치 기자가 친구를 오해한 것처럼. 그러나 이제는 떨 필요 없다. 착각이니까. 게다가 동성애자는 상대를 고르는 기준이 매우 까다롭다고 한다. 그래서 같은 동성애자라도 취향이 맞지 않으면 절대 사귀지 않는다. 이성애자와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까다롭다. 물론 항상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난 쓸데없는 착각에 3년 동안 고민했던 것이다. 이처럼 무지는 무섭다. 무지는 상대에 대한 몰이해를 낳는다.

얼마 전 고려대와 서울대의 퀴어 동아리 현수막이 외부인에 의해 찢겨진 일이 있었다. “난 너희들이 같은 성을 사랑하는 습성을 이해할 수 없어.”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는 것 또한 역설적으로 상대에 대한 앎을 전제로 한다. 알기 때문에 본인과 다른 측면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앎과 이해와는 그다지 필연성이 없는 것 같다. 그들은 동성애자를 알았지만 제 눈의 안경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상대를 외면했고 찢어버렸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것이 아니라 ‘이해하지 않은’것이었다. 그들에게 이해까지 바라는 것은 과분한 것인가. 이것은 내 착각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