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일 물리학과 교수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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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연구실에서 아침 1교시 수업이 있는 일반 물리강의실까지는 걸어서 5분이 걸리는데,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 하늘에 떠있는 밝은 해를 보다 보면 한 순간 허공과 해와 바라보는 나만이 존재하는 느낌이고, 해가 바로 앞에서 내게 쏟아지는 것 같고 내가 허공에 끌려 들어가는 것 같은 뭔가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을 갖게 된다.

매년 첫 학기 초의 강의는 정말로 희망차고 즐겁기까지 하다. 특히 이제 막 들어온 새내기 학생들이 열심히 배우려는 초롱초롱한 눈을 보면 강의가 신이나기까지 한다. 이것은 배움에 대한 믿음, 가르치는 교수에 대한 믿음, 그리고 가르침을 받는 학생에 대한 믿음과 열정이 알게 모르게 형성되어 있기에 가능하다고 본다. 그런데 이 배움에 대한 신뢰와 열정은 시간이 감에 따라 줄어들어 초롱초롱한 눈은 점차로 흐릿한 졸린 눈으로 변하고 급기야는 누워 자는 학생이 속출하는 현상에까지 이른다. 이렇게 되면 교수나 학생 모두 마지못한 ‘의무 수업’이 되고 만다. ‘의무 수업’이 되게 된 데에는 일차적으로 교수의 책임이 클 것이다. 학생들이 학기 초에 가졌던 신뢰와 열정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좀 더 재미있게 강의를 하였다면 마지못한 ‘의무 수업’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강의를 하는 대부분의 교수는 나름대로 잘 가르쳐보려고 하겠지만 어쨌든 이와 같은 상황이 오게 되면 난감함과 함께 소위 명강의 교수가 부럽게 된다. 일차적 책임이 교수에게 있다면 이차적인 책임은 아무래도 학생에게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배움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불행하게도 그 대가는 대부분 학생에게 돌아가게 된다.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대한민국 대학생들은 여전히 매우 소극적이다. 강의 내용이 이해가 안 되면 다시 설명해 달래야 하고, 물어보면 이에 대해 의사표시를 분명히 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가타부타 말이 없다. 교수가 도통한 도사가 아니고서야 아는지 모르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지 않은가. 대학생들이여, 강의실에서부터 적극적인 사람이 되기 바란다. 적극적인 사람이 사회생활에서나 인생에서 성공할 확률이 높다. 학생이기에 모르는 것이고 모르기 때문에 배우는 것이다. 배움은 학생의 의무이자 권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않는가. 옛말에 스승은 큰 종과 같다고 했다. 작게 치면 작은 소리가 나고 크게 치면 큰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내가 학생들에게 종종 해 주는 말이 있다. “No problem, no solution:문제없이 해답도 없다.” 성공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성공한 삶을 살 수 있을 가를 진지하게 궁리하라. 질문과 문제점은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배움과 도약을 위한 징검다리인 돌물목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유명한 역사학자인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연속이라고 갈파하지 않았는가.

믿음은 공덕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다. 배움에 대한 신뢰, 가르치는 교수에 대한 신뢰가 있다면 그 수업은 진지하면서도 활기찬 살아있는 수업이 될 것이고 그 결과는 학생에게 배움이라는 형태로 모두 돌아갈 것이다. 신뢰도는 물리실험에서도 측정치의 믿음을 나타내는 정도이다. 신뢰는 수업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대단히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주변의 사람이나 사회조직에 대한 신뢰도는 얼마인지, ‘남’이 생각하는 ‘나’에 대한 신뢰도는 얼마일지 한번 생각해보라. 그리고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보라. ‘나’는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 그리고 신뢰받을 만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