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전 선배학우들과의 일일 데이트
600년 전 선배학우들과의 일일 데이트
  • 성대신문
  • 승인 2006.06.05 00:00
  • 호수 1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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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기사부문 최우수작 정세원(사학00) 학우

“말에서 떨어질까봐 무서워 바짝 긴장해 있었어요”

5월 14일(일) 성균관 문묘 일대에서 펼쳐진 ‘2006년 성균알성시-디지털 과거마당’에 참여해 예과(한국어/외국어 시험)부문 장원을 수상한 변혜리(한문03)학우는 장원급제자에게 주어지는 영예인 유가행진을 겪어본 소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조선시대에도 사실은 그러하지 않았을까. 방 속 깊이 들어앉아 세월 모르고 글공부만 하다가, 짚신 몇 켤레 짊어지고 한양까지 천리 길을 걸어 올라왔던 선비가 막상 장원급제하여, 처음 타보는 말 위에 높이 앉아 한양 거리를 휘저을 적에 영예와 기쁨보다 앞섰을 감정은 ‘떨어질까봐 무서운’느낌이 아니었을까.

조선시대의 한 장면을 떼어온 듯한

성균관 유생들이 임금 앞에서 치렀다고 하여 ‘알성(謁聖)’이란 이름이 붙은 조선시대의 비정기 과거시험 성균알성시. 1백년 만에 부활된 옛 시험은 단지 ‘시험’만의 부활이 아닌, 잊혀져 있던 전통 문화의 재현이었다. 찾는 이도 없이 늘 굳게 닫혀 있던 성균관 문묘는 하늘색 유건도포 차림의 응시자들과 무관, 포졸, 내시 등 각종 전통복식을 갖춰 입은 자원봉사자들로 붐비고, 정문 옆 청룡상 일대는 백성들의 옷차림을 한 도우미들이 먹거리 장터와 전통 놀이마당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과거를 마치고 나온 응시생들이 잠시 쉬러 앉은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막걸리 잔을 들이키고, 아이들 손 잡고 나온 지역 주민들은 제기차기, 널뛰기, 윷놀이, 투호(화살 던지기), 떡메치기 등의 전통 놀이를 즐긴다. 붉은색 무관복 차림의 자원봉사자 이철민(행정00)학우는 “졸업을 앞두고 뭔가 기억에 남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라고 참가이유를 밝히며 “더운 날씨에 일하는 게 힘들지만 사람들이 많이 와서 기쁘다”고 덧붙였다.

일필휘지 대신에 일타휘지(一打揮之)라는데

포졸 세 명이 지키고 있는 대성전 안으로 들어가니, 동재와 서재 양편으로 늘어선 지붕 처마 아래로 백여 대의 노트북이 죽 늘어서 있다. 고사장은 600년 전의 그곳과 같지만, 시험문제와 방식은 21세기의 것이다. 곧 과거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리고, 응시생들은 붓 대신 마우스를 잡고 시험에 응한다. 인의예지 총 네 과목으로 이루어진 시험 분야 중에서 지과는 싸이월드 미니홈피와 한컴오피스, 제한된 시간 안에 한컴오피스 프로그램 세 가지를 이용하여 문제를 풀어야 한다. 결코 만만치 않은 방식이다. 시간은 금방 흘러서 다시 종료를 알리는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끝까지 노트북을 붙잡고 있는 집요한 응시생 몇 명을 제외하고는 다들 아쉬움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시(詩)부문인 인과에 응시한 곽진희(사학01)학우는, 문제가 어땠느냐는 질문에 “시제(時題)는 ‘월드컵’ 과 ‘오월’ 이라는 평범한 주제였지만 막상 써 보니 어려웠다”며 “시험 진행방식이 조금 미숙하고 어설픈 것은 마음에 걸린다”라는 평가도 남겼다.

괴물테란, 알고보니 전통테란?

비천당으로 발을 옮기니, 의과 시험인 스타크래프트 대회가 진행중이다. 의과 응시생들은 유건도포 대신 남색 무관복을 입고 경기에 응한다. 이미 장원 급제자와 준우승자가 결정되었는데, 갑자기 환호성이 하늘을 찌른다. 알고 보니, 현 스타크래프트 랭킹 1위의 프로게이머 ‘괴물’ 최연성 선수와 ‘꽃미남’ 김성제 선수의 등장이다. 2:2 팀플로 시범경기, 결과는 프로게이머 팀이 가볍게 낙승. 경기 후에 두 선수는 포도대장 옷으로 갈아입고 팬들과 사진을 찍는 서비스도 보여 주었다. 최연성의 팬이라는 김형진(사학01)학우는 “좋아하는 선수를 학교에서 볼 수 있어 좋았다”는 말과 함께, “과거시험에 인터넷 게임이 포함된 것이 처음엔 의외였지만 많은 학우들이 즐거워하는 것 같아 좋다”라며 행사를 칭찬했다.

그 날도, 오늘도 주인공은 성대인

이제 남은 건 수상자 발표, 문묘 주변에 흩어져 있던 응시생들이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바삐 명륜당으로 모여든다. 전통 무용공연 문묘일무로 시작된 식전행사에 이어 임금으로 분한 자원봉사자와 호위 행렬이 친림(親臨)한 가운데 발표가 시작된다. 장려부터 차하, 차상에 이르기까지 32명의 이름이 불려지고, 호명된 사람은 명륜당 무대 위에 정좌한 임금에게 절을 올리고 상장과 상금을 받는다. 수상자들의 면모 또한 다양하다. 아홉 살 짜리 어린이부터 일흔이 넘은 할아버지, 그리고 벽안의 외국인까지.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이 될 네 명의 장원 급제자의 이름이 불려진다. 쏟아지는 박수 속에 그들은 급제자에게 주어지는 연두색 도포로 갈아입고, 임금으로부터 홍패(합격증)와 어사화를 하사받은 후 간략한 축하연을 받는다. 전통 과거 절차의 방방례와 은영연의 재현이다.

악공과 광대 대신 풍물패와 자원봉사자들을 앞세우고, 말에 올라탄 네 명의 급제자들과 함께 유가행진이 시작된다. 지나가는 시민들도 발길을 멈추고 구경하고, 행렬에 따라붙는 이들도 있다. 젊음의 공간이라는 대학로, 차량과 인파로 사시사철 붐비는 이 거리를 오늘은 도포와 관복을 입은 젊은이들이 채우고 있다. 600년 전 과거 시험의 21세기 버전인 2006년 성균알성시, 비록 의미는 달라졌지만 변하지 않은 건 있다. 그 날의 주인공은 성균관의 젊은 유생들이고, 오늘의 주인공도 성균관의 젊은 대학생들이다. 디지털과 전통의 만남처럼, 2006년의 성균관 학우들은 그들의 까마득한 선배들과 오늘 하루 여기서 만난다. 휴일을 이용하여 성균알성시에 참가한 김표향(국어국문 00, 졸업)학우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학교만이 할 수 있는 행사이고, 학교의 자랑이 될 수 있는 행사이다. 매년 더 많은 참여를 통해 발전되고 성장하다 보면, 언젠가는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행사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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