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을 펴기 전에

시 가작 - 박의근(법97)

비는, 언제나 우산을 펴기 전에 내린다

흐린날, 길 모퉁이를 돌다가
갑자기 빗방울들이 달려들 때가 있다, 우산을
펴기 위해 고개 숙인 순간
한 사람과의 모든 추억이
한꺼번에 몰려들 때가 있다, 온 몸으로 퍼지는
황홀한 마비여, 그동안 보지 않으려 했던 것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지금 내가 말하는건
금이 간 보도블럭이나 건물벽에 핀 꽃들이 아니다
이미 슬픔이 된 것들, 기억과 시간이
가슴 깊이 스미려면
땅위에서 파편이 되는 저 빗방울들처럼
한바탕 몸살을 앓아야 하는 것을
봐라, 저 급한 발걸음 소리들을
쉽게 욕설을 뱉는 입김과 입김 사이를 건너다니는 바이러스들처럼
얼마나 숨가쁘게 살아왔는지
자랑하기 바쁜 사람들, 그들은 비에 관해
그리움이나 쓸쓸함을 말할 수 있겠지만
거리에 비가 올 땐 우산을 펴기 바쁠 뿐
따뜻한 방 안이나 빗물 하나 새지 않는 사무실에서
차가운 창문을 뿌옇게 흐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비는 언제나, 우산을 펴기 전에 내린다
두 손과 두 팔을 벌리고
올려다 보면
과거와 현재의 사이, 하늘과 땅 사이의
긴 긴 간격을 메우며 떨어지는
빗줄기, 두 눈 가득 다시 맺히는
서러운 방울방울로
이승과 저승이
하나 되어 추락하는 걸 
그 누가 알 수 있어
비......
오기 전에
우산을 편 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