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박은선 기자 (eternityes@skku.edu)
 내가 수습시절, 우리 학교에서는 ‘4.19 떼지어 달리기 ’가 열렸다. 그 행사를 알고 나서  ‘갈까 말까 ’란 생각도 잠시, 나의 역마살은 결국 선배기자들과 함께 취재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우리 학교를 필두로 열린 이 행사는 대학생들의 열정을 내 눈과 귀로 생생히 느끼게 만들었다. 행렬의 길이는 약 1KM정도 되었는데 그때 함께 동행했던 사진부 김호성 기자의 제안으로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그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그 때 난 처음으로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며 현장감을 느꼈고 ‘그 현장감을 사진으로 담아내고 싶다 ’란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로 사진부 이외에 다른 부서는 생각할 수 없었다. 부서배치 MT에서 나는 1지망으로 사진부를 선택했고 결국 난 사진부로 배정 받았다. 그 이후부터 사진기자란 이름으로 ‘카메라’를 친구삼아 세상을 담아낼 수 있게 됐다.

방중이 시작하고 몇 주 지날 때 쯤 나는 사진교육의 하나로 집회에 참여했다. 사진부 선배의 설명을 듣고 본격적으로 집회에 뛰어들었다. 카메라 바디에 망원렌즈와 광각렌즈를 번갈아가 끼우며 집회의 전반적인 모습과 사람들의 표정을 담아냈다. 그 때 내가 촬영한 집회는 ‘한미 FTA반대 집회’였는데 그 곳엔 주류 언론을 포함한 많은 기자들이 함께 있었다. 그들의 카메라에 비하면 부끄러울 정도로 안 좋은 카메라였으나 ‘아무렴 어떠랴. 내가 이렇게 뛰고 있는데, 이 카메라가 잘 담아내고 있잖아’란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순전히 자기만족에 빠져 있었다고나 할까?

집회자들 사이에서 사진을 찍다가 선배기자의 충고를 들었다.  ‘어떤 경우에도 몸을 먼저 챙길 것 ’이란 문자였다. 폭력이 오고가는 집회는 아니었지만 나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었음은 분명했다. 그렇다고 사진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잠시나마 로버트 카파의 기분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습겠지만, 이제 막 사진기자가 된 사람이 뭘 알겠냐고 되물어 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어찌됐건‘사진 찍는 사람’이 아닌 ‘사진기자 ’였다.

난 현장에 있는 것이 좋아 사진부 기자가 되었고 이제 사진부 기자란 이름으로 현장 속에 있다.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한 장의 사진을 위해 뛰어든 한 종군기자는 결국 지뢰를 밟아 죽었다. 나는 종군기자도 아니고 거창하게 아직 사진기자라고 말 할 정도도 아니지만 신문사에 ‘사진부 박은선 기자’로 몸담는 동안은 사진 한 장을 위해 학내와 사회 속에 뛰어들 생각이다. 그것이 내가 셔터를 눌러야 하는 이유이자 임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