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우리는 야생과 문명의 역학적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 결코 문명의 발전은 인간의 야생성을 쇠퇴시키지 못했다.(한마디로 문명과 야생은 반대급부적인 의미가 절대 아니다)

정신적 문명은 눈앞의 고기를 먹지 못해 펄떡 거리는 추한 인간 앞에 관념의 유희에 불과하며, 물질적 문명은 인간의 탐욕에 불을 활할 질렀다.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문명은 인간의 야생성 앞에 한없이 무기력했고 무기력하다. 그것은 우리 앞에 놓인 삶들을 관찰했을 때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야생이란 말 그대로 쉽게, 짐승적 삶이다. 강한 자는 약한 자를 먹는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먹히는 자는 눈물을 흘린다. 강하지 못한 자기 자신을 한탄하면서. 1년 뒤 강해질 자신을 상상하면서 이를 꽉 문다. 약한 자의 눈물.

나보다 1년 군입대를 먼저 했다는 사람의 발길질은 그보다 1년 군입대를 늦게 했다는 자의 참상에 눈물을 고이게 했다. 머리에는 피가 고였다. 피가 응고해 머리카락을 뭉치게 했다. 윗 침상에서 터지는 웃음소리. 아랫 침상에서 울리는 신음소리. 피 터지는 소리. 매주 일요일마다 하는 쇼프로그램 앞에서 윗 침상의 그들은 웃고 있었다. 그 웃음 속엔 1년 전 자신의 모습은 망각돼 있다. 오로지 현재라는 결과만 존재한다. 강한 자의 웃음.

그들의 폭력 앞에 쇼펜하우어는 무기력했다. 내 책장 안의 러셀과 프란츠 카프카와, 샤르트르는 무기력했다. 그들이 인류에 쌓아 올린 지적 문명은, 나를 때리려 다가오는 이의 동물같은 손찌검 앞에 종이쪼가리에 불과했다. 그들은 분노를 그대로 표출했다. 행동으로. 여기서 이데올로기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피가 있었고, 그들의 웃음이 있었다. 실소.

‘여기선 너가 밥 못먹는 걸 아무도 신경써주지 않아요 아저씨.’

무관심 속에, 고통 속에, 피 속에서 2년 동안 자라나는 우리들은 인간에서 동물로 변신한다. 그래서 동물의 사회를 만든다. 야생의 세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