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승영 기자 (xiahandme@skku.edu)

동춘 서커스단을 아는가. 때는 1925년, 당시 일본 서커스단원으로 일하던 조선인 박동춘이 일본인들의 횡포에 견디다 못해 조선인 30여 명을 데리고 나와 동춘 서커스단을 만들었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 최초의 서커스단이었던 동춘 서커스단은 곧 한국 최고의 서커스단이 됐고 6, 70년대에는 소속 단원 2백 50여명을 거느린 대형 극단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코미디언 1세대인 서영춘, 배삼룡, 남철, 남성남 등의 기라성 같은 스타들을 배출한 곳 역시 동춘 서커스단이다. 휘몰아칠 듯 화려한 세월을 넘긴 2007년 5월의 동춘 서커스단에는 전성기를 뒤로한 조금의 쓸쓸함과 급변하는 시대에 굴하지 않는 지조, 국내 유일이라는 자부심, 그리고 22살 최연소 곡예사 박선미가 있다.

김승영 기자(이하:김) :15년 가까이 곡예사라는 한 길만 걸어오면서 다른 길에 눈이 갔을 법도 한데, 어땠는가

곡예사 박선미(이하:박) :다른 직업을 꿈꾼 적은 없다. 9살 때 살던 전남 완도에 서커스단이 공연을 온 적이 있었다. 외줄을 타는 곡예사를 보고 단번에 반해 주저 없이 서커스단에 들어갔고 그때부터 곡예사라는 한 길에만 집중했다. 물론, 평범한 또래들을 부러워 한 적은 있었다. 곡예 연습에 집중하기 위해 학교에 다니지 않았고 유랑 극단이다 보니까 어린 나이에 친구를 만들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안 좋은 점들을 상쇄할 만한 것이 있었기에 지금껏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평범한 사람들은 절대 할 수 없는 곡예를 한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 무엇보다도 외줄타기에 대한 동경과 사랑이 나를 이끌었고, 이끌고 있다.

김: 외줄타기의 핵심은 무엇인가

박: 무념무상(無念無想)이다. 외줄타기에도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영화 <왕의 남자>에서 장생과 공길이 부채를 들며 화려하게 춤추듯 탔던 고전 줄타기, 다른 하나는 더 가는 줄을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그냥 외줄타기다. 성격은 달라도 ‘외줄을 탄다는 것’의 포인트는 줄에 올라서는 그 순간부터 줄타기가 끝날 때 까지 몸에만 온 신경을 쏟고 머리는 텅텅 비워야 한다는 것이다. 저 멀리 줄이 완전히 동여매져 엑스자가 된 곳만 쳐다보고 줄 타는 내내 머리 끝 부터 발끝까지 힘을 주되 균형은 유지해야 한다. 잡념이 생기는 순간 줄이 나를 내던진다. 가차 없다.

김: 그 많은 곡예 중에 왜 하필 외줄타기였나

박: 외줄타기를 주로 하지만 외발자전거도 탄다. ‘외’를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가장 어렵고 가장 아름답기 때문이었다. 아슬아슬하고 위험하고 한 곳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외’의 매력이 나를 끌어 당겼다. 그 위험과 노력을 뛰어 넘어 만든 외줄 위에서의 자태에는 어떤 인공적인 흉내로도 따라잡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외’라는 불완전함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라고나 할까.

김: ‘동춘 서커스단 최연소 곡예사’라는 타이틀이 가져다주는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자부심이거나 혹은 부담이거나

박: 개인적으로 ‘최연소 곡예사’라는 타이틀에 부여하는 의미는 없다. ‘곡예사’로서 갖는 자부심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곡예사라는 데서 오는 부담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외줄타기는 그저 내게 즐거움일 뿐이기 때문이다. 가만히 보면 나보다는 사회에서 ‘최연소 곡예사’라는 타이틀에 부여하는 의미가 큰 것 같다. 아무래도 내 뒤로 서커스를 배우겠다는 어린 한국 친구들이 없으니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점에서는 서커스를 하는 곡예사로서 걱정되는 부분이 없지 않은 게 사실이다.

김: 말이 나왔으니 솔직하게 한 번 이야기 해보자. 동춘 서커스단은 지금 닥친 위기를 타개해 나갈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박: 타개 방안은 단 하나다. 외부의 지원이나 대중들에게 받는 인기도 필요하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서커스를 배우겠다는 친구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맥이 끊기지 않는다면 서커스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서커스들은 대개 유랑 극단이니까 ‘곡예사=떠돌이 광대’라는 인식이 있고, 곡예사라하면 어디 붙잡혀 와 갖히고 맞아가며 연습하는 불쌍한 애들이라는 인식이 있는데 절대 아니다. 곡예사에 대한 이런 오해들이 없어지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

김: 무대에서 한 번 실수라도 하면 크게 다칠 텐데 무섭기도 할 것 같다

박: 실수해서 몸이 다치는 것은 크게 무섭지 않다. 그 대신 모든 관중들이 쳐다보고 있는 무대 위에서 떨어지게 되면 그야말로 그 넓은 무대 위에, 세상 속에 나 혼자되는 느낌이 들어 슬프고 두려워 질 때는 있다.

김: 서커스는 기예(技藝)라고들 한다. 기(技)와 예(藝)중에서 당신이 서커스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박: 서커스는 묘기가 만드는 예술이다. 기와 예, 둘 다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예술일 것이다. 서커스는 잔머리 쓰지 않고, 요령 피우지 않은 열정과 고뇌와 노력이 그대로 배어 나오는 예술이다. 아직 어려서 잘은 모르겠지만, 이런 면에서 보면 많은 예술 중에서도 인생과 퍽 닮은 예술이 서커스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