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올해는 심산 김창숙 선생께서 우리 곁을 떠나신지 만 45년 되는 해이다. 선생은 떠나시고 동상만 교정을 굽어보고 있지만 선생의 삶과 사상은 나날이 가벼워지는 우리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경북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명문가의 장남으로 태어나신 선생께서는 지조와 절개를 지킨 마지막 선비로서 유림운동 등을 통해 세계만방에 조선이 독립국임을 알렸다. 서슬이 퍼런 일제 치하에서 14년간의 옥고를 치르면서도 민족의 혼을 한순간도 놓지 않았고 해방 이후에는 통일을 위해 반독재 민주투쟁 위해 남은 여생을 불태우셨다. 무엇보다도 우리 성균인에게는 우리 대학의 설립자이자 초대 총장으로서 두터운 인연을 맺으셨다.

경술년 이후 총독부는 국가 최고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을 경학원으로 격하시키고 그 안에 명륜학원이라는 친일 교육기관을 만들었다. 이를 치욕으로 생각하던 선생께서는 건국의 대업을 실천하는 길은 진정한 민족 대학을 세우는 것이라 생각하셨다. 그리하여 광복이 된 해 11월, 남북 유림을 명륜당에 모아 전국유림대회를 열었고 성균관 대학 설립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당시 선생께서는 경학원에서 이름을 되찾은 성균관과 명륜학원에서 이름을 바꾼 성균관대학의 재단설립 위원장을 맡게 됐다. 이듬해인 1946년 9월 25일 백범 선생 등 많은 이들의 힘을 합쳐 민족 교육기관인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건물이 전무해 비천당을 학장실과 사무실로 사용했고 명륜당은 강당으로 썼다고 한다. 이렇듯 우리 대학은 600년이라는 성균관의 전통과 암울했던 우리의 역사를 극복하려던 선생의 의지가 만나 다시 탄생하게 되었다.

선생께서 떠나신지 45년만에 세상도 우리 대학도 무척 변했다. 이제 거리에는 독재에 항거하는 울부짖음을 대신해서 저마다의 이익을 향한 고함소리가 뒤덮고 있다. 광부나 간호사로 젊음을 외국에 바치지 않아도 선진국의 중산층이 한국산 자동차를 타고 중동 부호의 거실에 한국산 디지털 TV가 자리잡고 있다. 우리 대학도 국제화의 기치를 내걸고 세계화의 흐름에 선도가 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학생들도 정보의 홍수 속에서 숨가쁘게 경쟁해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선생의 진보적인 선비정신은 빠르게 변해가는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도 지나치게 가볍게 되지 않도록 우리를 이끌 수 있는 시대정신으로 부족함이 없다. 선생은 국가 존망의 위기에 어쩔 수 없이 칼을 잡았지만 오늘 우리는 다행이 칼 대신 붓을 잡을 수 있게 됨을 감사하며 다시 한번 심산선생의 삶과 정신을 되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