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끝에서 흘러나온 검은 꽃에는 디지로그의 향이 난다

기자명 김승영 기자 (xiahandme@skku.edu)

美와 서풍을 합쳐보자. 어떤 어휘가 나오는가. 답은 캘리그라피(Calligraphy)다. Calli는 美를 뜻하며 Graphy는 서풍, 화풍, 서법을 뜻한다. 그렇다면 서풍의 美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 일까?

캘리그라피가 다소 생소한 당신이라면 부엌 찬장을 열어 신라면을 꺼내보기 바란다. 큼지막하게 쓰인 辛과 그 뒤에 노란 테두리가 쳐진 라면이라는 글자가 근엄한 할아버지의 붓글씨체로 휘갈겨져 있음을 새삼스레 발견할 수 있다. 또 책장 안 오래된 책들을 꽂아 놓은 곳을 훑어보고 공지영의 소설 『봉순이 언니』를 발견했다면 꺼내 보시라. 아무렇게나 붓을 잡고 꾹꾹 힘을 주며 쓴 듯한 ‘봉순이 언니’, 이 다섯 글자의 서체에 사무쳐있는 그리움이 느껴지는가. 이쯤 되면 엄마의 화장대 위에 있는 설화수나 후와 같은 브랜드의 화장품들 역시 예사롭지 않은 붓 서체로 고풍스러우면서 고급스런 분위기를 내고 있음을 금방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밖에도 영화·연극·뮤지컬 등의 공연 포스터, 시중에 판매되는 식품, 정통 음식점 간판, 광고 카피 등에서 당신은 딱 떨어지는 반듯반듯한 이미지의 디지털 서체가 아닌 손으로 쓰여 정감 가득 담긴 붓글씨체, 즉 캘리그라피를 볼 수 있다.

아날로그의 칼과 디지털의 방패
물론 캘리그라피는 디지털과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 서예를 응용한 디자인이 컴퓨터 안으로 들어가면서 하나의 고정된 제품명 혹은 광고 카피의 글씨체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예와 디지털의 만남으로 탄생하는 캘리그라피는 대표적인 디지로그(Digilog, Digital과 Analog의 합성어)의 산물이라고도 불린다.

아날로그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디지털의 보석, 캘리그라피는 전문적인 핸드레터링 기술의 일종이다. 붓을 쥐는 힘의 강도와 획을 긋는 속도, 번짐과 여백, 무엇보다도 붓을 쥐고 글씨를 쓰는 사람의 마음을 통해 완성되는 이 캘리그라피는 의미전달이라는 문자 본연의 역할을 과감히 벗어던진 순수 조형 차원의 디자인이다. 이런 의미에서 캘리그라피는 의미보다 형태에 주목하며 ‘글자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기분 좋게 놀라운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현대사회 속 사람들은 오감 가운데서도 시각적 이미지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한다. 10초를 멀다하고 속속들이 등장하는 방송 프로그램의 현란한 자막들과 휴대폰의 최소 기능으로 자리 잡은 사진, 동영상 옵션들은 호모 비디오쿠스(videocus)라고 불리는 현대인의 본능이 만들어낸 경제적, 문화적 의미의 결과물들이다. 이와 같은 맥락 속에서 캘리그라피 역시 호모 비디오쿠스들의 본능을 정확히 간파하기라도 했다는 듯 치명적인 시각적 매력을 갖고 등장했으며 지금은 그 참신한 입지를 굳게 다지고 있는 중이다.

재료와 재주 그리고
‘디자인으로서의 글자’가 되길 결심한 캘리그라피는 그 예술적 감각을 재료와 기법 그리고 작가의 실험정신을 통해 여과 없이 드러낸다.

전통서예와 마찬가지로 캘리그라피의 기본재료는 지필묵연(紙筆墨硯)이다. 그러나 전통서예와 달리 캘리그라피는 이 기본재료들에 구속되지 않는다. 캘리그라퍼들은 붓을 커피, 우유, 콜라 심지어 썩은 먹물에까지 담그는데 이는 물과 다른 밀도를 가진 액체들의 다양한 번짐 효과를 내기 위해서이다. 그 가운데서도 우유는 부드러운 느낌을 위해 많이 애용되고 썩은 먹물은 정상 먹물의 번짐과 또 다른 느낌을 내는데 쓰인다. 특히 썩은 먹물의 경우에는 그 특유의 비정상적인 번짐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먹물이 지나치게 잘 번지는 화선지나 아예 번지지 않는 화선지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붓의 경우에도 서예 붓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호수의 미술 붓들을 특정 분위기의 용도에 맞게 선택, 이용한다.

캘리그라피 기법의 핵심은 누가 뭐래도 갈필이다. 먹의 진한 농담과 빠른 속도의 획을 통해 종이에서 붓이 떨어져 먹이 묻지 않는 흰 부분이 생기게 하는 필획을 바로 갈필이라고 하는 데 이는 우리나라 전통 미술의 고전적 아름다움인 여백의 미와도 상통한다. 갈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얼마나 속도를 빨리 해서 종이에 먹이 묻지 않게 하는가. 즉, 여백을 만드는가’와 관련된다. 이 기법을 표현하기 위해서도 서예 붓과 일반 미술 붓이 두루 사용되는 데 당연히 이 두 붓의 표현적 차이점은 존재한다. 표현해 내는 길이가 굉장히 짧은 일반 미술 붓에 비해 서예 붓은 획 자체를 길게 표현할 수 있고 여백 역시 원하는 부분 내지는 전체에 다 살릴 수 있다는 것이 그 차이점이다. 또한 두 붓이 나타낼 수 있는 선의 두께와 선에서 느껴지는 힘의 차이, 선의 길이에 의한 무한한 표현을 통해 다양한 갈필 효과를 낼 수 있다.

외에도 물과 먹의 혼용을 통한 번짐 기법은 여운의 미를 살려주는 효과를 발휘한다. 하지만 이렇게 효과는 달라도 모든 캘리그라피 기법들은 속도의 완급, 힘의 조절, 먹물의 함유량 그리고 많은 연습과 노하우를 필요로 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감성의 줄기에 실험 정신이라는 물을 주다
마지막으로 예술적으로 가치 있는 캘리그라피를 완성시키는 주요 핵심은 바로 작가의 실험정신과 감성이다. 다양하고 참신한 효과를 표현하기 위해 먹과 물 이외의 다양한 액체들을 붓에 묻혀보고 기존의 이미지를 깬 새로운 필체를 만들기 위해 뜨거운 바람의 드라이기를 쏘이거나 물을 촉촉하게 적신 다양한 습도의 화선지를 직접 만든다. 앞서 많은 연습과 노하우를 필요로 한다고 언급하긴 했지만 사실 캘리그라피의 관건은 ‘의도하지 않음’이다. 아무리 정신을 집중하고 똑같이 그리려 해도 5분 전에 완성한 필체를 그대로 나타낼 수 없는 게 바로 캘리그라피의 도도한 세계. 캘리그라퍼가 자신만의 느낌과 감성에 정신을 집중하고 그에 따라 붓을 잡은 그 손에 온 몸의 무게를 모을 때 비로소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진정한 예술로서의 캘리그라피가 태어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