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이혜인 편집장 (kirufif@skku.edu)

여름 방학 내내 학교에 나오면서 가장 많이 느꼈던 것은 ‘우리 학교가 정말 글로벌화 되고 있긴 있는 거구나’하는 생각이었다. 신문사가 위치한 호암관에 자주 있다 보면 중국어나 일본어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아마도 어학원에서 주관하는 성균IEP 강좌나 여타 다른 외국인 학생 대상 강좌 등이 호암관에서 많이 이뤄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방학뿐만 아니라 강의에서나 캠퍼스 곳곳에서 외국인 학우들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필자는 이렇게 외국인 학우들을 캠퍼스에서 만날 때마다 짧은 외국어로나마 말을 걸어볼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한참 취재를 하고 기획을 준비할 때는 외국인 학우들의 복지 상황이나 그들이 느끼는 불편한 점 등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번번이 그런 시도를 해보지도 못하고 스스로 그만두곤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때 먼저 말을 건네지 못했는지 참 후회스럽다. 기자라는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도 어쩌면 오히려 내가 그들을 우리 학교의 ‘이방인’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비단 외국인 학우들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학교에 다니고 있는 편입생들도 마찬가지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똑같은 학우들이면서도 ‘외국인’이나 ‘편입생’이라는 타이틀은 그들을 나와 구분지어 생각하게 하는 절취선처럼 변해버리곤 했다. 이러한 ‘이방인’이라는 의미를 조금 더 확장시켜 보면 우리 사회에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도 포함될 수 있다. 어쩌면 나와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모든 이들이 스스로가 만들어낸 이방인이 아닐까. 우리는 그렇게 수많은 타인들을 구분 짓고 또 자신만의 울타리를 넓혀 나간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 마음속의 그 울타리는 점점 더 길어져만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 모두 함께 잘 살아보자’라든가 ‘화합하며 살자’라든가 하는 말은 도덕교과서에나 나올만한 동화속의 이야기일 뿐일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에는 이런 말들을 하는 사람들을 두고 우매하다고, 시류를 모른다고 비웃는 시선들도 날카롭다. 대학의 총학생회 선거철이건 요즘 같은 대선철이건 이런 늘 ‘이상’을 좇는 사람들은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비판받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대학에서, 젊은이들이 이상을 생각하고 그것을 좇는 것이 그렇게 허무맹랑한 것일까. 우리 캠퍼스 내에서 나도 모르게 이방인이라고 생각했던 학우들에게 서로 다가가고, 또 더 나아가서 사회의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작지만 이상을 이루는 초석이 될 수 있다.

이번 호 성대신문에 꾸려진 이방인 특집은 그런 의미에서 많은 학우들에게 생각해 볼만한 계기점을 만들어 줄 듯 하다. 자신과 타인을 나누어 버리는, 어느 타인을 나도 모르게 ‘이방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한층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