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지현 기자 (kjhjhj1255@skku.edu)

22년을 엎드린 채로 세상을 바라봐온 사람이 있다. 두발로 서서 보는 세상보다 엎드려서 보는 세상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 여자가 있다. 그 중증장애인 여성은 이제, 국회 건물 곳곳을 전동 휠체어로 누비고 있다. '여성, 무학(無學), 장애'라는  세 가지 마이너리티를 골고루 갖춘 장향숙 국회의원의 인생개척기. 가슴 한 켠이 서늘해 질 수도, 짠해질 수도 있는 그녀와의 유쾌한 만남을 이곳에 풀어본다.

#1. 나는 여자이고, 장애인이다

■ ‘장애인’이란 호칭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고 쓰고 있다. 불편한 감이 있을 듯한데
네버, 전혀 없다(웃음). 1988년, 서울올림픽과 장애인올림픽이 잇달아 열리고 장애인복지법이 제정되면서부터 ‘장애인’이라는 호칭이 대중화됐다. 이전만 해도 장애인은 병신이라고 불릴 뿐이었다. 어느 날인가 한 어린아이가 나를 가리키며 “엄마! 저기, 장애인 간다!”라고 외쳤다. 부모는 소년을 꾸짖었지만 난 행복했다. 아이가 나를 장애인이라고 불러줬을 때 나는 그 아이에게로 가 꽃이 된 것이다. 비로소 사회가 장애인이란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됐다는 뜻인데 불편할 이유가 뭐 있겠나.

■ 한국에서 여성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여성장애인은 사회적 약자 중의 약자다. 여성은 일반적으로 성적 기능과 출산 기능을 담당하는 것으로 간주되지만 여성장애인은 ‘무성(無性)’,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씨받이로 들어가면 아이를 낳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힘과 권력의 논리가 적용되면 자연스레 성폭력이 일어나는 것이다. 장애를 가진 딸이 성폭행을 당하면 쉬쉬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예쁘고 말짱한 딸이 그런 일을 당했다면 집 안이 발칵 뒤집히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만큼 사회는 여성장애인의 침해당하는 인권에 무관심하다.
또한 여성장애인은 기본적인 교육권조차 가지지 못한다. 나 역시 무학력이다. 얼마 전 내게 어느 기자가 신정아 학력위조사건과 관련해 “무학력이기 때문에 받은 차별엔 무엇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장애 때문에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사회에 나가질 못했으니 차별을 느낄 기회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여성장애인이 받는 가장 큰 차별이다. 이런 현실이 내가 인권운동을 시작한 계기로 작용했다.

■ 여성장애인 인권운동을 하면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우리들의 문제를 ‘사회적 의제화’하는 것이다. 여성장애인은 어릴 때부터 ‘전생에 지은 죄가 커서 그렇게 태어난 거다’, ‘장애는 네 팔자다’와 같은 말을 듣고 자란다. 이것을 여성장애인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자존감이란 게 생길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를 개인적 문제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차별을 조장하는 사회를 문제시하는, 그런 의제화가 필요한 것이다.

■ 장애는 극복해야할 무엇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애인을 보면 “빨리 이겨내고 완쾌하셔야죠”라는 덕담을 던진다. 그러나 과연 장애인은 비장애인으로 거듭나야만 하는가. 장애인인 채로 남으면 안 되는가. 장애를 가진 사람은 정상인이 될 수 없는가. 답은 No다. 장애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삶을 투쟁의 과정으로 보고 주어진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것, 그리고 삶을 적극적으로 껴안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극복이다.

■ 자서전 제목인 『깊은 긍정』도 그러한 맥락의 의미인가
그렇다. 나는 걸음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래서 걷는 방법조차 모른다. 그러나 나에겐 나만의 걸음걸이가 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휠체어를 타고 굴러가는 것일지라도 내게는 그것이 걸음이다. 나는 그렇게 내 삶을 긍정했다. 장애를 쉽게 긍정하지 못하는 이들은 미련 같은 기억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걸었던 느낌부터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 했던 기억까지, 그 모든 감각을 갖고 있으니 자신이 장애인이란 사실을 더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나의 장애와 삶을 긍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2. 운동경험 바탕으로 한 17대 국회의원 활동

■ 국회의원이 된 것을 두고 ‘권력에 눈이 먼 장애인’이란 비판도 일었던 걸로 아는데
문지방도 넘지 못하던 중증장애인이 무슨 권력욕을 가지겠나. 나처럼 성질 더럽고 욕 잘하는 사람이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여성계와 장애계의 추천, 격려, 그리고 장애인도 국회에서 목소리를 낼 때가 됐다는 나의 결심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경험한 여성장애인의 인권문제를 국회로 가져가 내 손으로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고 싶었다. 나는 ‘장애인 국회의원 장향숙’이 아니라 ‘국회의원 장향숙이 장애인’이라는 객관적 평가를 받기 위해 어느 의원보다 부지런히 뛰었다. 비판의 여지는 없다.

■ 구체적으로 어떤 성과를 거뒀나
현재 제대로 된 틀을 갖춘 장애인 관련법은 대부분 내가 관여한 것들이다. 장애인이 장애인을 위한 법을 만드니 의욕이 마구 샘솟았고 그렇게 신날 수가 없더라. 무엇보다 장애계의 숙원이던 장애인차별금지법(이하:장차법)을 발의하고 제정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법안을 통해 장애인에게도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사회에 각인시켰다. 장애인복지법 전면개정으로 재활이 아닌 자립생활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이뤄냈고 장애인연금제도의 기초도 닦았다. 그러나 연금부분에 있어서는 아직 현실적인 개혁과 끈기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 이밖에도 해외입양중단 청원, 실험동물 보호법안 제출, 다문화가족지원법 발의 등을 통해 폭넓은 인권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 장차법에 거는 사회의 기대가 큰 만큼 강제력이 미흡한 부분에 대해서는 아쉽다는 의견이 많다. 어떻게 보완해나갈 생각인지
아직 시행되지도 않은 법안에 강제력을 담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장애인 인권에 대한 합의점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아 제정하기까지 수많은 난관을 이겨내야 했는데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대신 차별시정 권고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 이를 법무부장관 소임으로 넘겨 과태료를 물게 하는 정도의 제재방안은 마련했다. 시행착오를 차차 해결하면서 지속적으로 법안을 개정해나가겠다.

■ 운동계로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나
이제 여성운동은 나보다 더 싱싱하고 열정적인 후배들이 이끌어나가고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나는 나 나름대로 국회에서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을 찾았기 때문에 당분간은 정치계에 몸담을 생각이다. 기회가 된다면 18대 국회에서도 장애인을 아우르는 보다 포괄적인 범위의 사회적 소수자를 위해 활동하고 싶다.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소수자의 범위는 훨씬 넓다. 단지 숫자가 적기 때문에 소수자인 것이 아니다. 어떤 형태로든 사회로부터 억압받고 있고 인권을 온전히 보장받지 못한다면 그게 바로 소수자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을 위해 더 넓은 공간에서 ‘뛰어다닐’ 나를 지켜봐 달라(웃음).

■ 남은 임기 동안 매진하고 싶은 일은
UN 장애인권리협약 비준만큼은 꼭 이뤄내고자 한다. 이는 활동보조 서비스나 이동시설 확보와 같이 장애인이 필요로 하는 편의사항들의 즉각 이행을 촉구하는 협약이다. 장애인 인권보장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보기 때문에 현재 주력하고 있는 과제다. 더불어 아시아의 장애인을 위한 국제적 역할을 수행하려고 한다. 아시아에는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는 일도 벅차 장애인의 인권은 당연하다는 듯이 침해받고 있는 빈곤국이 많다. 이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교육·의료·재활을 지원하기 위해 얼마 전 황금고리재단 발기인 총회도 가졌다. 재단이 구체적으로 발전되면 비장애인 빈곤계층을 위한 지원도 해나갈 계획이다.

#3. 대학, 그곳에 ‘인생’이 있다

■ 평생 동안 읽은 만권의 책들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
정규교육을 받을 수 없었기에 독서는 세상을 향하는 나의 유일한 통로였다. 방 안을 ‘뱀처럼’ 기어 다닐 수밖에 없는 내게 책이 없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나의 처지가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의 그것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이방인』의 뫼르소를 통해 갑갑한 의식의 허물을 벗었고 『갈매기의 꿈』을 읽으면서 자유롭게 하늘을 비행했다. 그렇게 문지방을 베고 누워 책을 읽으면서 외로움과 무료함을 달랬고 ‘장향숙’의 정체성을 만들어갔다.

■ 학교를 다니는 또래들이 부러웠을 것 같은데
물론이다. 그러나 20대의 나에겐 ‘영라이프’ 모임이 있었다. ‘더 깊은 인간으로 성장하기’를 모토로 한 영라이프는 청소년 선교가 목적이긴 했지만 독서와 고민 상담이 주요활동이었다. 나이는 내가 많았지만 나를 믿고 따라주는 학생들로부터 학교와 사회를 배웠고, 진정한 우정을 깨달았다. 그 이후로 나는 어딜 가나 꼭 학생들을 만난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아는 모든 이를 함께 사랑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작은 만남이더라도 소중하다.

■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무엇을 얻나
나는 무언가를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돕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대학생을 만날 기회가 많은데 그때마다 ‘이 학생은 어떤 고민을 갖고 무엇을 지향하며 살고 있을까’라는 궁금증이 인다. 많은 학생들의 정답은 취업과 학점이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인생’이다. 우리는 공(空)테이프로 태어난다. 그 필름에 어떤 영화를 담아내느냐는 자신에게 달렸다. 내가 내 인생의 감독이 돼야 하는데 이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학생이 많다.

마지막으로, 대학생들에게 하고픈 말은
개인의 삶이 완성되는 데는 반드시 ‘사람’이 있어야 한다. 지금의 장향숙이 건재한 것도 숱한 사람들의 애정 어린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을 함께 한다는 것은 생명을 함께 한다는 뜻이다. 여러분도 싱그러운 그 청춘을 소중한 사람과 소중한 마음으로 보냈으면 한다.

인터뷰 내내 기자를 바라보는 장향숙 의원의 눈빛은 너무나 인자해 마치 어머니를 마주대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몸은 비록 정지해 있어도 마음은 무한히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아름다운 향숙 씨는 한 시간 남짓 동안 온 몸으로 표현했다. 인터뷰가 끝난 후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자 기꺼운 표정으로 “My pleasure!”를 외치던 그녀의 당찬 음성이, 아직도 귓전을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