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수 할머니

기자명 김승영 기자 (xiahandme@skku.edu)

그녀는
이팔청춘 꽃 같은 나이엔 일본 군인 막사에서
도시코로 통했고
종전 후 겨우 강제 위안소에서 벗어날 때 즈음엔
위안부 또는 종군 위안부라고 불렸다.
그러나 그녀는 도시코도 아니고
종군 위안부는 더더욱 아니다.
그녀는
외교통상부 건물 앞에서 1인 시위를 한 적이 있고
미국 의회에서 쓰라린 정신대 역사의 궤적을
서슬 퍼런 목소리로 되짚었으며
요즘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수요일이 되면
일본 대사관 앞에서 굳은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는
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의 Leader, 이용수다.

■ 지난 7월 말 美 하원 의회에서 ‘혼다 결의안’이 통과됐다. 세계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국가이자 일본의 최고 우방국인 미국에서 첫 결의안이 통과됐다는 데 여러 의미들이 있는 만큼 감회가 새로웠을 것 같다.
혼다 결의안 통과는 지난 2월 15일에 미국 의회에서 청문회를 한 것을 시작으로 계속된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물론 결의안이 통과돼 일본의 전범(戰犯) 행위에 대한 부당성이 전 세계에 알려지고 있다는 데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 하지만 이번 결의안 통과 과정은 단순히 안건을 통과시키는 데만 의의가 있는 시간들이 아니었다. 미국의 한인 교포 사회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줬는데 그 더운 미국 땅 한복판에서 일요일도 없이 서명운동이며 모금운동을 해줬다. ‘어쩌면 그렇게 헌신적으로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두 팔을 걷어 부치고 결의안 통과 과정 곳곳에서 힘써줬던 것이다. 또한 결의안 통과의 핵심에 있었던 마이클 혼다 의원의 지치지 않는 열성도 감동적이었다. 특히 7월 30일, 결의안 통과가 최종으로 결정되고 나서 그 덩치 크고 나이도 많은 양반이 나를 붙잡고 엉엉 우는 걸 보고는 ‘내가 참 복이 많은 사람이구나’라는 걸 느꼈다. 끊임없이 나를 다독여주며 “다 잘 될 것이다”라고 말해준 그들이 그 더운 미국 햇볕 아래서 나를 쓰러지지 않게 한 힘이었다.

■ 혼다 결의안을 기점으로 해 지난 8일에는 유럽 최초로 네덜란드 의회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됐고 이제 캐나다 의회에서의 결의안 상정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일본의 성 전범 행위에 대한 역사적 판결이 국제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듯 하다.
일본의 위안부가 생겨난 이후에 전 세계적으로 성폭력이 급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국가적 규모로 일본이 자행한 여성의 성노예화는 비단 일본과 피해 여성들 간의 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윤리적인 문제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전 세계가 우리의 결의안 통과에 주목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우리 할머니들의 외침이 처량한 신세한탄이 아니라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설득력 있고 숙명적인 움직임이라는 것. 이제 세계적으로 책임회피를 할 수 없게 된 일본은 하루라도 더 빨리 우리 앞에서 무릎 꿇고 진심으로 사죄해야 할 것이다.

■ 결의안 통과 과정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떠올린다면?
마지막에 美 하원 의장이 결의안과 관련해 통과 여부 판결을 내리던 때가 떠오른다. 나이가 지긋한 의장이 망치를 세 번 탁, 탁, 탁 두들기며 결의안 통과 결과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데 그 과정에서 ‘이용수’라는 이름이 몇 번이고 나왔다. 그렇게 겁 많은 처녀였던 내가 이렇게 까지 컸구나 싶었다. 마음이 툭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랄까.

■ 지긋하신 연세인데 일본이며 LA이며 왔다 갔다 하는 게 힘들진 않으신지?
어휴, 힘들고말고. 금년만 해도 지금까지 미국에 4번 일본에 3번 갔다 왔는데 특히 미국에 갈 때면 열 몇 시간을 꼼짝없이 비행기 안에 앉아 있어야 하니 몸이 편칠 않다. 시차적응도 힘들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다른 할머니들은 연세가 많고 그나마 가장 젊은 축에 속하는 내가 이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을. 무엇보다 이건 나의 개인적인 일이다. 내 문제를 나 말고 누가 해결할 수 있겠는가?

■ 시간이 많이 흐르긴 했지만 과거의 아픈 기억들이 불현듯 생각날 때가 있을 것 같다. 특별히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나 기억이 있다면?
기자 양반 틀렸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나는 그 당시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먼지 같은 기억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다. 1년에도 몇 번 씩 공식 석상에서 증언을 하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다. 증언을 할 때면 그 옛날의 기억들이 다시 새록새록 머릿속에 피어나면서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다. 또 몸에 흔적들이 남아 있지 않은가. 군인들의 발길질에 결국 터지고만 복막염 상처도(상의를 올리는 이 할머니의 손으로 시선을 좇다 보니 복부 오른 편에 깊게 패인 흉터가 보인다) 뚜렷하게 남아있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성병으로  아주 고생을 했다. 그 뿐인가. 위안소 주인에게 반항했다가 당한 전기고문으로 아직도 손은 저리고 당시 ‘엄마!’라고 질렀던 비명은 환청처럼 내 주변에 남아있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다.

■ 종전 후 집으로 돌아와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정대협) 활동을 하기 전까지 또 나름대로 힘겨운 생활을 했을 것 같은데.
46년도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 때가 열일곱이던가 여덟이던가. 아무튼 어린 나이였으니까 내가 당한 일이 무슨 일이었는지 왜 당해야 했는지도 잘 몰랐던 때였다. 그게 전쟁이었는지도 나는 몰랐으니까. 그냥 집에 돌아와서 따뜻한 밥 먹고 가족들을 다시 볼 수 있어서 마냥 좋았다. 그래도 본능적으로 받았던 충격이 컸던 탓인지 남들 앞에만 서면 밤낮으로 벌벌 떨었고 한 동안은 대문 밖에도 나가지 못했다. 가족들에겐 일절 내가 당한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게 되고 세상을 알게 되면서 내가 겪은 것이 무슨 일이었는지 알게 됐던 것 같다. 부모님은 돌아가실 때 까지도 모르셨는데 딸자식 시집가는 것도 못 보고 가신다며 눈 감으시는 그 순간까지 마음 아파하셨다. 94년도에 부모님 산소에 가서 처음으로 말씀드렸다. ‘일본 군사들한테 강제로 끌려가서 그런 일을 당했습니다’ <불효자는 웁니다>를 부르면서 엄마, 아버지 앞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일본이 나를 불효녀로 만들었다.

■ 정대협 활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는?
92년도에 정대협에 신고를 했는데 처음엔 단체에서 나오라고 하니까 나갔다. 그 때만 하더라도 아무 것도 몰랐고, 겁도 많았다. 그러다가 일본 정부가 계속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을 포장하고 세계를 상대로 거짓말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래선 안 되겠다. 내가 나서야겠다’ 싶더라. 어떤 사람들은 나의 증언을 두고, 여자로서 공개적으로 말하기에 창피할 수 있는 이야기라며 내가 대단한 용기를 가진 것 마냥 이야기 하는데 나는 창피하지 않다. 수치스러워해야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알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일본 정부다. 나는 일본 총리의 멱살도 잡는 사람이다. 진실된 이야기만 해온 난 그 누구 앞에서도 부끄러운 적이 없다.

■ 이 할머니와 달리 대내외적인 활동에서 적극적이지 않은 할머니들도 있는데 그 할머니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이가 많고 모르니까 남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거듭 말했듯이 우리는 전혀 수치스러울 게 없는 사람들이다. 언제, 어디서와 같은 자세한 사항은 모를 수 있다 하더라도 ‘무슨 일을 누구에게 당했는가’에 관해선 분명히 확실하게 말을 해야 한다. 간단하지 않은가! 일본 너희가 그런 반인륜적이고 비윤리적인 행위를 했으니 내 인생을 보상하라고. 그렇게 모진 고통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떳떳하게 말 한 번 하지 못하고 세상을 뜨는 할머니들을 보면 답답하기도 하고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일본을, 세상을 향해서 똑똑하게 분명히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

■ 일제 치하에서 나라의 딸들을 일본군들에게 끌려 보냈던 힘없는 조국 대한민국은 정신대 문제와 관련한 일본과의 투쟁 과정에서도 여태껏 이렇다 할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섭섭하고 미운 감정도 있을 것 같은데.
위안부 결의안 통과도 원칙적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이뤄져야 했던 것이다. 지금껏 어떤 대통령도 속 시원하게 일본을 향해 문제 해결을 촉구하지 않았다. 과거사를 청산이라는 번지르르한 말만 가끔씩 꺼낼 뿐 실질적인 논쟁은 아예 시도조차 안 한 것이다. 요즘도 우리 외교통상부는 대한민국의 외교통상부가 아닌 것 같다. 슬금슬금 외국의 눈치나 보고 똑부러지게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한다. 특히 65년에 박정희가 일본과 맺었던 한일협정은 일본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게 하는 영원한 장애물로 남을 것이다. 그것만 아니었더라면 좀 더 젊었을 때 더 튼튼한 기운으로 싸울 수 있었을 텐데. 우리 정부에는 그런 애증어린 감정들이 있는 게 사실이다.

■ 마지막으로 한국의 여대생 내지는 20대 여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잘못된 우리 역사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참여할 줄 아는 여성들이 됐으면 한다. 특히 정신대 문제는 ‘한국 여성의 역사’이기도 한 만큼 데모(수요 집회 등의)에도 자주 참가해 잘못 흐르고 있다는 역사는 왜 잘못 흐르고 있는 것인지, 이것을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는지 스스로 깨닫는 기회를 젊은 여성들 스스로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특히 역사의 한 가운데서 옳고 그름을 외치는 주체적인 여성이 되기 위해선 젊을 때 배우고 또 배워야 할 것이다. 그래서 미래지향적인 태도로 역사의 올바른 빛을 비추는 지성인들이 되길 바란다. 또 여자들인 만큼 더욱 더 자신의 몸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아가씨들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