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승영 기자 (xiahandme@skku.edu)

토요일 아침 11시. 나는 전 날 밤에 일본에서 귀국하신 이용수 할머니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일흔 아홉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 일본인이든 고위 관리든 남자든 불의(不義) 앞에서는 언제나 서슬 퍼렇게 소리를 지르는 여장부다움, 며칠 단위로 해외를 오가는 체력. 이용수 할머니에 대한 나의 인상은 ‘강철’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강철에 대한 존경심을 조용히 가슴 속에 간직한 채 나는 벨을 눌렀다.

하지만 문을 여는 순간 강철의 차가움은 찾기는 힘들었다. 고소한 생선 구이 냄새가 풍겨오는 주방을 지나쳐 들어간 안방엔 아침 일찍 피로를 풀기 위해 목욕탕에 다녀오시고 화장을 예쁘게 하신 이 할머니가 계셨다. 곱고, 정갈하고, 푸근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대구에서 태어나 지금도 대구에 사시는 이 할머니의 무뚝뚝한 사투리엔 소녀시절을 일제 치하에서 보낸 80년의 세월이 묻어났다. 무심한 듯 매정한 말투지만 금방 그 작은 눈 가득히 물이 고이기라도 하면 내 눈에도 물기가 차올랐다. 단지 증언 당시의 감정을 말하는 것일 뿐인데 할머니의 눈물이 내게까지 전염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언론을 통해 강한 모습만을 보여 왔던 이 할머니를 실제로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그 강함 뒤에 감춰진 슬픔과 아픔과 외로움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이용수 할머니가 이 글을 보신다면 “여자로서 따가운 상처를 가득 안고 살아온 80 평생을 고작 스무 살 밖에 안 된 네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 꾸짖으실 수도 있겠지만 난 말하고 싶다.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며 같은 여자로서 할머니가 안고 사셨던 상처를 더 이해하는 한국의 여자가 되겠다고.     

치욕적인 민족 역사의 슬픈 강을 건너온 할머니의 눈물을 보면서 나는 그 시대를 함께 건넜을 사랑하는 나의 할머니를 떠올렸다. 내가 그토록 사랑한 할머니와 한 시대의 아픔을 공유한 분이라 생각하니 급기야는 두 할머니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따뜻한 마음으로 끝낸 인터뷰 후 잠시 스쳐 지나간 이 할머니의 손길은 너무 따스하고 부드러워, 나의 할머니도 이 할머니의 손녀도 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