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가현(예술사) 강사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knews.com)

가족구성원이 되기를 포기한 가족들의 ‘혈육의 정 새삼 깨닫기’. 이러한 깨달음의 진수를 보여준 영화 <리틀 미스 선샤인>을 보면 은둔형 외톨이 조카 드웨인과 실연당한 게이 삼촌 프랭크가 고통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아무도 읽지 않는 소설을 20년간 써댄 프루스트지만 그 고통의 20년을 프루스트는 사랑했으며, 인간이 고통이 없으면 고통을 추억할 수 있는 즐거움도 없으니 인생을 살면서 깜짝 선물 같은 요소 중에는 약간의 고통도 포함된다는 훈훈한 대화였는데, 정리하자면 고통을 세련되게 대처해라는 것보다 훗날 세련되게 기억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예술의 영역에서는 고통의 기억이 아닌 현재 진행되는 고통을 세련되게 대처한 경우도 간혹 볼 수 있는데, 시대를 초월하는 미감(美感)을 가진 예술가 중에서는 생의 비극에 직면해도 그 고통을 통해 작품의 영감과 작업의 성실함을 얻는 사례가 있다. 만성우울증에 3~4가지 질병을 달고 다닌 고호는 말할 것도 없으며, 병약함과 불안증으로 일생을 홀로지낸 뭉크도 쉼 없는 작업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스스로 위로했었다.

죽음과 같이 정복되지 않는 두려움이 주는 고통은 정신적 한계를 뛰어 넘게도 해준다.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는 죽음이 가까이 왔다고 느끼는 순간 괴력을 발휘해 생 쉴피스 성당의 그림들을 마무리 했고, 파울 클레는 40세를 갓 넘은 나이에 근육이 위축되는 경피증에 걸려 희망 없이 죽어가면서도 “나는 창조한다. 울지 않으려고”라는 말과 함께 고통을 작품의 주제로 삼았다.

클레의 말년은 생물학적 고통, 즉 악마적인 통증으로 혼절과 기사회생을 하루 동안 열두 번도 더 반복하며 살았는데, 이 상황은 오히려 예술가의 임무를 더욱 더 종용했다. 그는 살기 위해 그리고, 그리기 때문에 더 빨리 죽어가는 처절한 상황을 견뎌냈고 이는 질병과의 투쟁이 창조의 피드백으로 작용하는, 정신이 몸을 정복한 대표적인 예로 꼽고 있다.

고통이 정신적, 육체적 고통만 있는 건 아니다. 발자크는 매일 줄어드는 은행잔고와 어머니의 끊임없는 돈 독촉 편지 그리고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기다리지만 오지 않는 돈 많은 과부의 배신에 시달리면서 부도난 어음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기한을 연장하고, 빚더미의 출판사 사장을 달래주고 그 출판사 사장이 보낸 깡패들을 문밖에 세워놓고 살아야하는 몇 달 동안 가장 심오하고 풍부한 사유가 담긴 야심작 <루이 랑베르>를 썼다고 한다. 생활고라는 절박한 고통과 곱게 죽지 못할 수도 있다는 극한의 두려움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불후의 명작을 쓰게 했다 볼 수 있는데, 발자크는 이 소설로 단숨에 경제적 안정과 가정의 화목, 시민적 명예를 되찾는, 고통이 행복으로 바뀌는 환희의 순간을 맛본 셈이다.

위 이야기들은 결국 결과론이겠지만 어쨌든 긍정의 힘으로 고통을 살펴봤을 때 고통이란 솔선수범해서 겪을 필요도 없지만 굳이 불행의 등가물은 아닌 것 같다. 심금을 울리는 세기의 사랑도 대부분은 열정과 고통의 극적인 결합인 걸 보면 세상의 규칙 안에 고통이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오히려 오만방자한 삶에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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