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60주년 특집기획

기자명 김승영 기자 (xiahandme@skku.edu)

박지수 기자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식이 거행되고 남북은 지금껏 그 끝이 보일 듯 보이지 않는 평행선을 그어 왔다. 그렇게 그어진 평행선은 세기도 넘기고, 세대도 넘겨 이제 60년 이라는 세월 속으로 접어들고 있다.
분단 60년, 한민족 한의 원천인 아픈 역사의 흔적과 그것이 남긴 주옥같은 분단 문학들을 2008년 겨울의 철원에서 만나보았다.
  

“서울 같은 도심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곳에선 대남 방송만 없으면 주위가 너무 고요해서 100~200여 m 정도 떨어진 상태에서도 목소리만으로 대화가 가능합니다. 그런데 가-1초소 쪽에서 북쪽 아이들이 이쪽을 향해서 뭐라고 지껄이는 거예요. 주로 내용은 너희들 거기서 뭐하냐, 힘들지 않으냐, 배고프면 이리 와서 식사나 같이 하자 뭐 그런 시덥 잖은 이야기들입니다. 이해하실지 모르겠는데, 만약 김수혁이 지른 소리에 또 그쪽에서 대꾸를 한다면 이건 국가 보안법 회합 통신죄에 해당하는 중범죄지요. 우습게 들리시나요? 하지만 이건 엄연한 사실입니다.”                               
 박상연의 소설 「DMZ」 中

▲ 제2땅굴                                                   박지수 기자
모노레일카를 타고 올라간 평화전망대에서는 휴전선을 기준으로 2km씩 떨어져 있는 남, 북방한계선과 그것을 지키고 서 있는 남북 군인들의 초소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비록 북한군들의 초소는 산꼭대기에 작은 점처럼 보여 뚜렷하게 분간할 수 없지만 휴전선을 등지며 딱딱하게 총을 들고 서 있는 두 나라 군인들 간의 씁쓸한 긴장감은 확실하게 느껴진다. 특히나 전망대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 기자의 모습을 힐끗하고 쳐다보는 남한 군인의 이질감 어린 눈빛은 한 민족으로서 같은 피를 가진 심장을 답답하게 만들곤 한다.

이렇게 만날 순 있지만 만나선 안 되는 남북 군인들의 경직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박찬욱 감독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를 떠올리게 된다. 어둔 밤 갈대 밭 사이에서 지뢰를 밟고는 북한 병사 정우진과 오경필 중사를 향해 “살려주세요”라며 우는 얼굴을 했던 코믹한 모습의 이수혁 상병. 그 모습은 과연 영화에나 나올법한 장면일 뿐인 걸까. 오직 황량한 겨울바람만이 자유롭게 휴전선을 오가고 있다. 물론 이 모든 것들도 500원 짜리 은빛 동전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떨어져야 전망대 렌즈를 통해 희미하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 노동당사                          박지수 기자
군청 공무원과 군인들의 엄격한 통제 속에 통제소를 빠져 나와 도로를 달리다 보면 어둑하게 내리고 있는 땅거미 위에 괴기스럽게 서있는 노동당사를 만나게 된다. 바로 8·15 해방 후 북한이 공산독재의 정권강화와 국민통제를 목적으로 건립해 공산치하 5년 동안 양민수탈을 일삼았다는 곳이다. 보수공사로 인해 둘러쳐진 쇠 울타리 안에서 느릿느릿하게 숨을 쉬고 있는 당사를 보고 있노라면 거대한 해골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휩싸인다. 해가 지면서 더 차가워진 철원의 바람을 다 맞으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당사 외부는 세월의 흔적과 함께 깊어진 건물의 금 사이로 고동색의 잡초들이 우울하게 자라나고 있고, 내부 천정에는 작지만 날카로운 고드름들이 대못처럼 달려 있어 지역 주민들을 시체나 반송장으로 만들만큼 잔인했다던 당사의 고문을 떠오르게 한다. 무엇보다도 폐허가 돼 엉망진창이 된 당사 한 켠에 비교적 깨끗하게 보존된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이라는 문화재청의 팻말은 해골 같은 당사보다 더 아릿한 아픔을 가져다준다.

당사 뒤편에는 고문으로 죽은 양민들을 묻었다는 크지 않은 마당이 나온다. 아픈 민족 역사의 희생양으로 전락해야 했던 철원 양민들의 피와 살이 묻혔을 마당 위로 지금은 봄이 오길 기다리는 무궁화 묘목들이 겨울바람에 흔들리지도 않으며 서있다. 경이롭게도 나뭇가지들이 하나같이 향하고 있는 곳은 북쪽 하늘이다.
“현공, 그간 많이 변하셨다구요?”
“제가요?”
현은 약간 우울했다. 현은 벌써 이런 경험이 한두 번째아니기 때문이다. 해방 이전에는 막역한 지기(知己)여서 일조유사한 때는 물을 것도 없이 동지일 것 같던 사람들이 해방 후, 특히 정치적 동향이 보수적인 것과 진보적인 것이 뚜렷이 갈라지면서부터는, 말 한 두 마디에 벌써 딴 사람처럼 서로 경원(敬遠)이 생기고 그것이 대뜸 우정에까지 거리감(距離感)을 자아내는 것을 이미 누차 맛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쩌자구 우리 현공은 공산당으로 가셨소?”
“제가 공산당으로 갔다고들 그럽니까?”
“자자합디다. 현공이 아모래도 이용당하는 거라구.”
 이태준의 소설 「해방 전후」 中

▲ 이태준 문학비                             박지수 기자
강원도 철원하면 빼 놓을 수 없는 예술가가 바로 소설가 이태준이다. 1904년 생으로 고난과 역경의 한국 근현대사의 한가운데를 살았던 그는 월북을 감행하기 직전까지의 생의 대부분을 이 철원에서 보냈다. 1922년 단편 소설 「오몽녀」를 『조선문단』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한 그는 「고향」, 「북의선생」등을 발표해 ‘조선 단편 소설의 완성자’로 평가 받게 된다. 그러나 ‘월북 문인’이라는 꼬리표로 인해 80년대 까지 제대로 된 문학사적 평가를 받지 못했고, 1988년 월북문인에 대한 해금이 공표되면서부터 그의 문학에 대한 연구는 활기를 띄기 시작한다. 그 중에서도 그의 대표작인 「해방 전후」는 주인공 ‘현’을 통해 분단 후 월북을 결심한 지식인으로서의 자신을 형상화한 자전적 소설로 유명하다.

2004년에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그의 문학비와 흉상은 노동당사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아픈 역사를 살아간 지식인으로서 그가 가졌을 고뇌와 고향을 저버리고 월북을 결심했을 때 느꼈을 아픔, 그리고 억센 역사 속에서 ‘월북문인’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해야 했을 세월의 상처는 차가운 돌비석과 청동상이 되어 남아있다. 그리고 그의 문학이 사람들의 가슴 속에 남아있다.

이 다리 반쪽은 네가 놓고
나머지 반쪽은 내가 만들고

철조망도 못 막아
지뢰밭도 또 못 막아
휴전선 그 반은 네가 허물고
나머지 반은 내가 허물고
이 다리 반쪽은 네가 놓고
나머지 반쪽은 내가 만들었 듯
 신경림의 시 ‘승일교 타령’ 中

철원 기행의 마지막 코스는 승일교가 될 수밖에 없다. 어둠 속에서 세 가지의 색깔을 발하고 있는 그 모습은 해가 다 지고 나서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햇빛이 환할 땐 그저 오래되고 낡은 옛날 다리에 불과했던 승일교는 이렇게 밤이 되고 나서야 참 모습을 드러낸다.

▲ 승일교                                    박지수 기자
북한 정권 하인 1948년에 북한이 장흥리 쪽에서 공사를 시작해 절반 정도 건축됐던 다리는 6·25사변으로 중단될 수밖에 없게 됐고 수복 후 우리 정부에서 북한과는 약간 다른 공법으로 나머지 공사를 마무리 했다고 한다. 결국 남북의 분단을 육안으로 보여주는 산물인 승일교는 뜻하지 않게 남북의 합작으로 완성된 것이다. 보다 남쪽으로 뻗어있는 다리의 1/3 가량은 파란 불빛이, 북쪽으로 뻗어있는 1/3가량은 빨간 불빛이 밝혀지고 있고, 그 두 불빛 가운데 하얀 빛이 발하고 있는데 이 하얀 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한민족이라면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단 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빛을 발하고 있는 2008년 1월의 승일교 앞엔 군인도, 민간인도, 남한 사람도, 북한 사람도 없이 그저 철새들과 겨울바람만 서성대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