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용민 기자 (claise@skku.edu)

20평 남짓한 수원의 맥간 공예 연구실.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맥간 공예 작품들은 하나같이 검은 바탕 속에서 금색의 휘황찬란함을 뽐낸다. 그렇게 농촌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보릿대의 투박함은 장인의 섬세한 손을 거쳐 여느 명품 못지않은 고급스러움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김용민 기자(이하:김) 맥간 공예라는 개념은 일반인들에게 매우 생소하다. 우선 맥간 공예가 무엇인지 설명해 달라
이상수 공예가(이하:이) 보리 줄기를 이용해 만든 공예이기 때문에 맥간(麥幹) 공예라고 이름을 붙였다. 보리 줄기로 공예를 한다고 하면 일반인들은 대를 엮어 만든 맥고 모자나 바구니 등을 떠올리기 십상인데 맥간 공예는 이와 다르다. 맥간 공예는 빨대 모양의 말린 보릿대를 얇게 펴 나무판 위에 붙이는 방식으로 예술을 구현하는데 그 속에서 나타나는 보리의 은은한 금빛이야말로 맥간 공예만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김 공예 재료로서 보릿대는 쉽게 볼 수 없는 특이한 소재인데
보리가 가지고 있는 금색은 싫어하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이상적인 색이다. 보리는 자연 그대로의 금빛을 띄고 있기 때문에 생소하지만 공예를 하기에는 좋은 재료라고 생각했다. 또한 보릿대는 부드러워서 바탕재가 무엇이든 간에 잘 달라붙는데 이는 공예 재료로서 큰 장점이다. 기본적으로 나무판에 붙이긴 하지만 타조 알, 가구, 심지어 냉장고에도 잘 붙는다.


김 보릿대라는 재료를 공예에 접목시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보릿대라는 재료를 발견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내가 20대 초반이었던 70년대 후반에 경북 청도에 있는 산을 오르다 잠시 쉬고 있었는데 보리짚단이 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을 이장님께 물어보니 “주민들이 맥고모자를 만들어 팔려고 쌓아놓은 것”이라고 하더라. 그 때 처음으로 보릿대에 관심이 생겼다. 이후, 나이 드신 분들이 원통형의 보릿대를 눌러서 반짇고리 장식이나 베게 장식으로 종종 사용하는 것을 보다가 즉흥적으로 ‘보릿대를 세로로 잘라 얇게 펴 칠을 하면 좀 더 예쁜 공예로 거듭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3년 동안 맥간 공예 연구에 매진해 예술의 틀을 잡을 수 있었다.


김 맥간 공예의 모든 기법을 이 공예가가 특허로 묶어놨다고 알고 있는데 상식적으로 특허는 상업적 용도로 쓰기 위해 신청하는 것 아닌가? 더군다나 이 공예가는 작품도 팔지 않아 상업화의 길을 걷지 않고 있다.
80년대 자개장 열풍이 불었을 때, 자개장 장식과 비슷한 맥간 공예의 상업화 유혹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한때 친구들과 동업해 상업화를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사업을 하다 보니 상업화가 맥간 공예의 본질을 해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뒀다. 맥간 공예는 보릿대의 아름다움을 발현시키는 예술이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특허로 모든 기술을 묶어놓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성급하게 상업화하다 보면 자칫 맥간 공예의 예술적 측면이 퇴색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허는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다.

김 처음에 언급했듯이 아직 맥간 공예는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입지가 확고하지 않은 편이다. 맥간 공예의 발전을 위해 어떤 방안을 강구하고 있는지?
맥간 공예의 기반이 다져지고 일종의 ‘붐’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대 공예이기 때문에 문하생이 배출되기 시작한 것은 10년이 채 안됐고 지금까지 맥간 공예의 모든 과정을 전수 받은 제자도 3명에 불과하다. 어설픈 전수는 안한 것 보다 못하다는 생각으로 신중을 기했기 때문이지만 맥간 공예를 대중화시키기에는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전문대학 강좌나 아카데미 개설 등을 통해 맥간 공예가 좀 더 대중적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김 앞으로의 맥간 공예는 어떤 모습이길 바라는가?
스포츠카 페라리나 유럽의 공예처럼 수작업과 소수 제작으로 맥간 공예의 앞에 ‘명품’이라는 수식어가 붙길 바란다. 맥간 공예는 보릿대를 말리는 과정부터 맥간 공예 작품을 말리는 과정까지 하나하나 수작업을 통해 탄생하는데 이런 맥간 공예에 대중들이 ‘명품’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 나의 작은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