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용민 기자 (claise@skku.edu)

지금 우리가 따스하게 맞이하고 있는 봄은 사전적으로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계절적 의미, 나머지 하나는 ‘희망찬 앞날’이라는 비유적 의미죠. 그런 의미에서 70여 년 전의 폴란드에는 봄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의 배경인 바르샤바에는 맑은 하늘과 꽃내음 대신 탄약냄새가 진동할 뿐이었죠.

영화 속의 저명한 유태인 피아니스트인 스필만에게도 봄은 먼 나라의 이야기 였습니다. 바르샤바의 방송국에서 피아노를 치던 그의 행복한 일상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단숨에 산산조각이 나버리죠. 그러던 어느 날, 은신처에서 배고픔에 지쳐 통조림을 따려고 하는 스필만의 눈앞에 낯선 독일 장교 한 명이 등장합니다. 자신을 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은 독일군 앞에 굳어버린 스필만. 그러나 유태인 피아니스트라고 자신을 밝힌 그에게 장교는 다소 의외의 한 마디를 던집니다. “피아니스트라면 피아노를 한 번 쳐 보게나”

 

장교의 엉뚱한 요구에 스필만은 잠시 머뭇거리다 건반 하나를 지그시 누르며 인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연주를 시작합니다. 스필만의 평온했던 지난날을 묘사하듯 느리고 조용한 음으로 시작되는 연주는 어느 한 순간을 기점으로 크게 요동치며 전쟁의 상흔을 표현하죠. 그러다가 다시 느려지는 곡의 템포는 포화가 터지기 전의 평온한 일상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그의 열망을 더욱 간절하게 나타냅니다.

그가 그토록 혼신을 다해 연주하는 곡은 바로 조국의 음악가 쇼팽이 작곡한 ‘발라드 1번’입니다. 이 곡은 19세기 초, 러시아가 폴란드를 침공할 당시에 쇼팽이 만든 곡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요, 폴란드를 떠나있던 쇼팽은 군화에 무참히 짓밟히는 조국을 보면서 참담함을 금할 수 없었고 그런 그의 마음과 평화의 염원을 음악에 고스란히 녹여냈죠. 이런 그의 메시지를 반증하듯 1번곡은 4개의 발라드 중에 유일하게 단조로 구성돼 음울한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그리고 이 음울함과 염원의 조화는 제작진이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감동을 이끌어내는 영화의 심장과 같은 장면을 만들어 내기에 이릅니다.


이렇듯 암울한 시대를 겪었던 그들은 찢어지는 심정으로 스러져가는 조국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혼은 결코 그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애타게 봄을 부르짖었죠. 끝이 보이지 않는 겨울 속에서 봄을 틔우고자 한 두 명의 피아니스트. 그들의 피아노 연주는 조국의 긴 겨울잠을 깨울 자유에 대한 염원이 녹아 든 폴란드의 혼이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