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국가 혹은 정체(政體)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즉 폴리스(Polis)이다. 국가를 보호하는 일을 경찰police이라하고 이 국가에 사는 사람들을 시민=공민(polites)이라 한다. 따라서 국가는 시민들의 안전(security)을 지키고, 그들의 자유를 보호하는 일을 그 본분으로 삼으며, 그런 한에서 시민들은 국가에 대한 납세, 병역 등의 의무를 진다.

그런데 어떤가하면, 한국에서는 바로 이 국가, 정규군이 별반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멀리 고려시대나 임진왜란으로 소급할 것도 없이 근대 이래의 을사조약, 한일합방, 한국동란 등등의 사건들에서 늘 폴리스를 지킨 것은 한국의 정규군이 아니라 의병들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자.

이와 같은 말을 꺼내는 이유는 최근 한국에서 일어난 여러 재난들에 대해 생각해보기 위해서이다. 서해 앞바다에 새까만 기름이 하염없이 흘러나와 바다와 해안을 더럽히고, 국가 정체성과 관련된 문화재가 불타고 하는 과정에서 펼쳐진 한국의 풍경은 다시금 한국에 정규군은 있는가, 시스템을 구축하고 시민의 안전을 지키는 제대로 된 국가는 존재하는가, 라는 새삼스러운 질문을 던지도록 만든다.

물론, 거대한 재난에 국민적인 협력을 통해 대처하는 것은 그 자체로 ‘더불어 사는 한국인’의 모습을 보여준 사건이자, 장엄한 풍경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자신이 가져간 천으로 돌을 닦거나 빈민을 구제하거나, 또 문화재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일은 실제로는 주권을 넘겨받은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국가는 사건의 원인을 밝혀 그 책임주체에게 배상을 요구하는 한편, 닥쳐올 재난에 체계적으로 맞서는 보호자 혹은 경찰의 역할을 해야 한다. 왜 우리는 서해로, 또 숭례문으로 달려가는가. 국가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 국가의 지도자가 될 사람조차 이를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들의 십시일반이나 봉사로 해결해야할 문제로 생각하고 있는 장면에 처해서는 과연 아연해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한국 사람들은 수많은 성금 모으기와 캠페인에 속아왔다. 평화의 댐 건설이나 금 모으기 운동과 같은 국가적인 캠페인의 결과는 대규모 사기와 속았다는 실망감만으로 남았다. 세금을 통해 구성된 시스템이 스스로의 일에 충실치 못할 때, 인간의 선의와 덕(德)조차 불신의 늪 속에 메마르고 만다.

국가를 언제든 엎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보는 무의식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의 정의와 진보적 열기에 공헌해온 측면도 없지 않다. 분단은 이러한 국가의 상대화를 강화해온 기제 중 하나이다. 국가를 신뢰하지 않고 일종의 픽션으로 보는 사고는 국민적 동의와는 무관하게 가해진 법폭력과 그 결과로 설립된 정부들 탓이기도 하지만, 한국인이 살았거나 살고 있는 국가들이 종종 엉성하고 무책임한 것이었다는 역사적 경험에 기인한 측면도 많다. 사회를 보호하는 근원적인 작업에는 무관심한 ‘캠페인 국가’보다는, 시스템화된 합리성과 개별적 삶의 안정을 아우르는 국가가 필요한 이유이다.

공익이나 실용의 이름으로 사적 자유와 구체적 삶을 제한하면서, 글로벌화와 같은 표어로 일방적인 통치를 행하는 일들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국가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생각해보며, 이렇게 물어본다. 개인과 사회를 ‘개조’하려 하기에 앞서, 개인과 사회를 어떻게 ‘보호’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만약 그렇지 않을 때 의병들의 불운하고 장엄한 출현은 다시금 반복될 것이며, 그런 한에서 대한민국의 앞날도 그리 밝지만은 않다. 잘 발달된 양심은 잘 발달된 제도로부터 나온다.

황호덕(국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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