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구(중문)교수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1990년 말의 어느 겨울날, 그 때까지 한 번도 한국을 떠난 적 없었던 나는 3시간 정도의 짧은 비행으로 수 년 동안 살게 될 따뜻한 남쪽나라 ‘Formosa’라고 불렸던 이국적인 섬나라에 도착했다. 타이완에 도착하자 야자나무를 비롯한 열대의 수목과 습하고 뿌연 회색빛 하늘에서 내뿜는 그 이국적인 냄새를 맡았을 때의 그 느낌은 지금도 쉽게 잊을 수 없다. 그 후 타이완에서의 유학생활 동안 그러한 냄새가 낯설지 않고 친근하게 느껴지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같은 동양적 문화를 공유하는 나라이기에 동질감이 많이 존재하겠지만, 낯선 땅에서 새로운 환경을 맞이하는 방문객에게는 언제나 이질감이 더 먼저 더 강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나의 유학생활은 타이완 학생들과 함께 부대끼는 생활로 시작되었다. 학교 밖에서 거주하는 유학생들도 있었지만 나는 타이완 학생들과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했다. 타이완의 학생들은 정말 공부를 안 하면 무엇을 할까 싶을 정도로 모두 열심히 공부하였고 그들의 생활은 단조로움 속의 성실 그 자체였다. 기숙사생활, 수업, 여가활동 등 대부분의 시간을 그들과 함께 보내지 못했더라면 아마 나는 그들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고 그들의 외형만을 보고 피상적인 선입견만을 굳혀왔을 것이다. 후배, 동기들과 함께 타이완에서는 잘 하지 않는 그룹스터디 활동도 하고, 밤까지 연구실에서 함께 공부하다가 어떤 때는 늦게 야식도 함께 즐기는 과정에서 내가 느꼈던 이국적인 타이완의 뿌연 냄새는 빠르게 사라져 갔다.

박사졸업을 하기까지 타이완에서 5년여의 시간을 보냈다. 지금도 마음속에 남아 있는 따스한 추억들은 타이완의 스승 및 학우들과 공유했던 사랑과 신뢰의 순간들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한 가지 일은 평생 잊지 못할 뜨거운 감동으로 남아있다.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기 몇 개월 전이었다. 그 때 나는 이미 결혼한 지 2년 정도 되었었고 첫 딸이 생후 5개월 정도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 갑자기 그 딸아이가 고열이 나서 체온이 40도를 육박했고 약을 먹어도 열이 식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드문 일종의 풍토병에 걸린 것으로 진단되었으며 후유증 없이 치료하려면 긴급히 상당히 비싼 처방을 해야 했었다. 지도교수님의 주선으로 긴급하게 큰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또한, 학과 교수님들이 백방으로 알아보고 병원의 구호기금을 사용토록 노력해주셨고, 타이완 친구들과 학우들이 정성스럽게 돈을 모아 와서 병원비에 보태라고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 때, 우리 가족은 말할 수 없이 큰 감동을 받았다. 당시 우리 가족이 그 어려운 상황을 잘 극복한 것은 그들의 경제적 도움보다 그들의 그 따뜻하고 훈훈한 마음 때문이었다.

타국에서의 그 경험들은 내 가슴 깊은 곳에서 언제나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때로는 국가, 민족과 같은 울타리보다 오히려 주관적 편견과 이기적 고집이 만든 인위적 장벽이 더 높은 것이 아닐까 반문해 본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인간적인 사랑과 신뢰가 삶의 가장 큰 원동력임을 결코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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