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돌린 연주가 김병규

기자명 김용민 기자 (claise@skku.edu)

 만돌린 연주가 김병규씨
한국 만돌린의 선구자라 불리는 김병규씨의 연주를 듣다보면 ‘숲’과 ‘바람’과 ‘물’이 들린다. 짧지만 분명한 음색에서 이뤄지는 소리의 자연화는 어떤 현악기도 쉽게 범접하지 못할 영역이리라. 그렇게 그는 만돌린 현에 자연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김용민 기자(이하:용) 만돌린은 일반인이 쉽게 접하기 힘든 악기인데 이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김병규 연주가(이하:규) 만돌린은 약 200여 년 전부터 클래식에 쓰였던 이탈리아 민속악기로 기타랑 비슷하지만 크기는 3분의 1인 현악기다. 소리가 구슬프면서도 맑은 것이 특징인데 본체가 작기 때문에 소리가 작고 표현력이 바이올린보다 떨어지지만 음색이 짧고 분명해서 마치 자연을 거니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또한 여러 개로 합주하면 마치 여자어린이가 합창하는 것 같다.
이런 매력들 때문에 유럽과 일본 등지에서는 수백개의 만돌린 오케스트라가 있을 정도로 인기다. 그러나 한국에는 연주단이 20여 개 정도밖에 안되고 그나마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단체는 많지 않다.

실대 만돌린 오케스트라 출신인데 만돌린을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약간 우습지만 원래 대학교 신입생 때 기타 동아리에 있었는데 재학 도중 만돌린 동아리와 통합되면서 만돌린을 처음 접하게 됐다. 당시는 ‘악기가 참 여성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 그렇게 큰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만돌린에 대한 애착이 생기기 시작했다. 컴퓨터 관련 직장을 다니면서도 동아리 OB자격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만돌린 연습을 했는데 그러다가 만돌린을 본격적으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39세에 이탈리아로 만돌린을 배우러 건너갔는데 너무 늦은 나이에 유학을 결심한건 아닌가?
 사실 유학은 나 자신의 의지보다는 아내의 권유가 결정적이었다. 이화여대에서 만돌린 강연을 하던 시절, 하루는 만돌린 모임 정기 연주회를 했는데 공연이 끝난 뒤 아내가 ‘연주가 실망스럽다’며 미적지근하게 배우지 말고 유학을 가서 본격적으로 배우라고 하더라. 지금처럼 당시에도 국내에 만돌린을 가르치는 학과가 없었기 때문에 만돌린을 본격적으로 배우려면 해외로 나가야 했다. 그래서 나는 아내와 외동딸을 데리고 무작정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유학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음악 명문학교인 파도바 음악학교 과정을 수료했다
 한 달 동안은 나를 포함한 가족 모두가 울면서 지냈다. 심지어 슈퍼마켓 주인도 다른 사람에게는 친절하게 하는데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나는 노골적으로 무시하더라. 학우들과는 나이차이 때문에 쉽게 친해지기 힘들었다. 다시 말해서 외로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다행이었던 것은 내가 그나마 영어로 말 할 수 있었고 담당교수가 나와 의사소통이 됐다는 점이다. 처음엔 조금 힘들었지만 차차 익숙해지면서 세계 정상급 만돌린 연주단인 브레시아 오케스트라에서 제 1 만돌린 연주가로 활동하고 음반을 발매하는 등 안정을 찾아갔다.
 7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국내에서 연주가 생활을 하게 됐는데 시작은 어땠나?
 국내에 만돌린 연주를 할 수 있는 터전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만돌린 연주 하나로 먹고 살기는 정말 힘들었다. 7년 전부터 만돌린 연주가로 활동했는데 그 당시 첫 달 수입이 10만원이었을 정도니 말이다. 그래도 활동을 꾸준히 한 덕에 1년에 2~3개의 만돌린 오케스트라가 새로 생기는 것을 보면 생활은 넉넉하지 않아도 뿌듯하다.

 만돌린으로 수많은 자선음악회를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특히 각막이식연주회는 20여회에 달할 정도로 꾸준하다
규 대학 동아리 후배 중 한 명이 시각장애인이는데 지하철에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각막이식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뜻 있는 동지들을 모아 각막이식연주회를 정기적으로 열고 있다. 그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약 10여년 전에 한 소녀가 각막이식 연주회 자선기금을 통해 빛을 되찾았는데 그 소녀가 수술 후 이 연주회를 함께했던 순간이다. 각막이식 연주회를 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꼈던 것 같다.

 만돌린 연주가로서 앞으로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면?
 독주 음반도 내고 싶고 각막이식콘서트도 200회 넘게 이끌고 싶지만 무엇보다 대중이 만돌린을 더 많이 접하고 연주회에 더 많이 찾아줬으면 한다는 것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만돌린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것이 만돌린 연주가로서 이루고 싶은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