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승기(독문) 교수

기자명 성대신문 (webmaster@skkuw.com)

벌써 여러 해 동안 화요일은 나에게 특별한 하루다. 강의하러 서울 가는 날이다.

양평의 한 산마을에 황토집을 짓고 이사 온지도 이제 10년이 가까워 온다. 이른바 느린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집 안팎에 할 일은 더 많아졌지만 그래도 조금은 더 ‘조화로운 삶’과 시간의 여유를 누리고 있다. 부실한 허리도 아직은 뜰, 텃밭, 나무 따위를 가꾸도록 기꺼이 허락하고 있고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어 참으로 좋다. 더구나 이런 저런 이유로 - 꼭 읽고 싶었지만 - 그러지 못한 책을 골라 잡을 수 있고, 그렇게 음악을 듣고 또 차나 술 한잔 들고 나무 그늘에 그냥 앉아있거나 먼 산을 볼 수 있으니 사치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요즈음 이런 여유가 생활(삶) 뿐만 아니라 강의(준비)에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스스로 강의와 토론(또는 대화)시간을 더욱 즐길 수 있고, 마주한 이들에게도 바람직한 소통의 공간을 열어 줄 것이다.

우리는 가속적인 변화의 시대에 편입되어 있다. 대학과 학문의 관점에서 보면,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의 접근과 통합을 비롯하여 학문분야 사이의 경계넘기는 서로에게 필수적인 과제로 앞에 놓여있다. 이런 상황은 거꾸로 교수와 학생 모두에게 자기 전공과목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그 본질과 존재이유에 대한 더 넓고 다층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그 만큼 할 공부의 범위도 넓고 창조적 성찰의 여유도 그 만큼 더 필요하다.

내가 맡은 강의의 제목은 <서양 미술과 음악의 이해>와 <도이치 문화사 특강>인데, 학기 마다 바꾸어가며 한 강좌 씩 하고 있다. 본디 <예술사>라는 제목으로 1979년에 일반 교양과목으로 시작했으나 어느 힘있는 과에 빼앗긴 뒤 위와 같은 이름으로 과에서 신설한 것들이다.

그 때는 박정희 독재정권의 말기였다. 오히려 교내가 더 험악한 역사의 현장이었고 학생들의 눈에도 아름다운 분노를 넘어 차츰 삭막한 증오의 빛이 번져가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잠시라도 머물 곳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 분노와 참여의 참 뜻을 잊지 않도록. 나의 제안을 학교가 수용했다. 시설도 갖추지 못한 썰렁한 강의실에 수백명씩 들어왔기 때문에 자리도 모자랐고 차분한 분위기가 아쉬웠지만 적잖은 보람이 있었다.

한편 나는 이제야 강의할 준비가 되어 간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강의에 필요한 자료는 물론 주제와 작품에 대한 시야와 심층적 이해 그리고 무엇보다 문화 예술작품과 함께 호흡하며 즐길 여유와 능력이 갖추어져 가기 때문이다. 

나에게 10년이 넘는 유학생활은 큰 복이었다. 전공과목 밖에도 마음껏 강의를 들을 수 있고, 교수와 듣고 싶은 강의를 찾아 두 번이나 대학을 옮길 수도 있었다. 더구나 돈 한 푼 내지도 않고. 부전공 하나였던 미술사 쎄미나 하나를 잊을 수 없다. 제목은 <스페인 미술> 이었는 데 주제를 하나 씩 맡아서 발표 토론을 하며 한 학기 동안 준비한 뒤 바로 이어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20일에 걸쳐 스페인을 거의 일주하면서 현장에서 작품을 앞에 두고 토론하는 방식이었다. 교수 두 분과 강사들이 함께 했고 그 밖의 참석자는 거의가 박사학위 과정에 있는 학생들이었다. 그 곳의 풍토와 전통, 역사를 배경으로 작품 자체를 고찰하면서 나누던 이해와 해석의 다양한 관점들은 기대 이상으로 나의 눈을 뜨게 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비행기 표값, 20일 간의 버스 대절비와 숙박비 따위 모든 비용을 주 정부에서 지원하는 것이었다.

현재 우리 정부는 10여년 이전으로 후퇴하며 거꾸로 달리는가 하면, 교육에는 ‘다람쥐 체바퀴 돌 듯’ 하는 경쟁만 있을 뿐 그 목표 조차 보이지 않는 듯 하다. 그럴수록 한숨 돌리며 돌아보고 내다 볼 머무름의 여유가 더욱 필요하다. 얼의 자양분들도 그렇다. ‘날 마다 적어도 시 한편, 음악과 그림 하나’(괴테)는 공급해야 하지 않을 까. 오래 전에 어느 학생이 시험답안지에 쓴 말이 떠오른다. 그는 강의시간에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둘째 악장을 듣고 “서양 고전음악은 귀 기울여 들어본 적도 없었지만, 음악이 이렇게 아름답고 숭고할 수 있음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는 소감을 전했다. 한 두 학생만이라도 이런 체험을 한다면 강의에서 무얼 더 바라겠는가. 마르틴 부버는 이런 말을 남겼다. “하루에 적어도 한 시간 만이라도 진정 자기의 시간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이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