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용민 기자 (claise@skku.edu)

사실 지금 ‘예술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철저히 주류에 남는다는 것을 뜻한다. 주류에 속하지 못하면 대중의 관심을 받기도, 경제적 여유를 갖기도 어려워진다. 현재 거대자본과 특정 작품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대학로의 경향만 봐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때문에 실험예술과 같이 철저히 비주류에 속한 움직임은 많은 제약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볼 수 있듯이 사고의 전환이 차지하는 비중은 논의 자체가 필요 없을 정도로 크다. 얼마 전 드라마 ‘베토벤바이러스’에서 화제를 모았던 존 케이지의 ‘4분 33초’는 소음도 음악이라는 사고의 전환을 불러왔고 피카소의 미술 화법은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당대 예술의 패러다임을 바꾼 움직임은 모두 실험예술에서 나왔으며 그런 혁명은 고전이 돼 대중 곁에 영원히 남았다.

그러면 한국의 실험예술은 어디에 서있을까? “이쑤시개 꽂을 소극장 하나 없더라”는 어느 실험연극인의 푸념어린 비유처럼 한국예술의 미래를 이끌어 갈 진보적 움직임은 현실적인 문제에 좌절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약을 걷어내며 새로운 세계에 발을 내딛고자 하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문래동 창작촌’과 <서울변방연극제>는 예술에 대한 끊임없는 진지한 성찰을 통해 한국 예술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비록 그 소리가 크진 않지만 말이다. 
<관련기사 5면>